# 【바람풍 편지】 - ‘불안’의 역설

by 박대영


이른 아침부터 산을 넘어온 바람이 우당퉁탕 산골 오두막을 흔들어 깨운다. 어이쿠, 놀라 눈 비비며 창문 너머 달아나는 바람의 꽁무니를 쫓을 무렵, 어느 틈엔가 햇살이 창을 넘어와 제 맘대로 아랫목에 널브러지니, 이런! 이것들이 오늘따라 왜 이러나? 하다가 문득, 아! 봄이 왔구나, 봄바람이고, 봄빛이었구나, 바보 도 트는 소리가 자동이다.


또 한 계절이 가버렸구나. 다가오는 계절이 무상하게 가버린 지난 계절이 아쉬워 탄성을 내지르고만 것이다. 지나간 계절의 나날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무엇을 잃어버렸던가. 또 다른 계절이, 그 봄이 왔건만 지나간 시간에 갇힌 한 사내는 공연한 후회와 불안에 전율을 느낀 것이다.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자꾸만 뒤돌아보아지고, 뒤돌아볼 때마다 다가오는 후회와 또 그만큼의 불안이 쌓이니, 이를 어쩔 것인가.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삶의 안정성과 자기 존재에 대한 확신도 더불어 성장해야 하는 것이거늘, 실상은 나이만큼의 새로운 불안에 떨고 있었으니, 오호! 통재라. 찬물 들이킨 아침 늙은 이빨이 토해내는 신음만큼이나, 끄응~ 아프다.


른들의 불안은

'생각이 많아서'


왜 어른들은 불안할까?


정신분석 전문의인 김혜남에 따르면, 어른들의 불안은 ‘생각이 많아서‘라고 말한다. 문제는 그 ’생각‘이라는 것이 주로 통제 불가능한 미래에 대한 앞선 걱정과 떠나보내지 못한 과거의 상처에서 비롯된 '심리적 짐'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즉 ’바꿀 수 없는 것‘에 매달려 세상의 고민이란 고민은 다 짊어지고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는 어른들이 겪는 걱정의 96%는 쓸데없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니 고작 4%의 고민만이 유의미하다는 말이다. 결국 우리는 안 해도 되는, 그리고 저도, 나도 어쩌지도 못하는 문제에 얽매여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는 말인즉슨 지난밤의 전전반측(輾轉反側)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굴업도

쓸데없는 걱정이나 불안 요소 중 대표적인 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즉 미래를 미리 앞당겨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제대로 준비나 대비도 하지 못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바꿀 수 없는 일에 얽매여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지난 과거나, 타인의 마음, 죽음과 같은 어느 누구도 어쩌지 못하는 것들에 매달려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후, 건강, 죽음 등 수많은 ’염려증‘이 그것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대비야 필요하겠지만, 그 증세가 지나치니 문제다.


물론, 나이가 든다는 것은 경제적 불확실성이 커지고, ’왕년에’를 입에 달고 살아야 할 정도로 사회적 역할이 축소되고, 지나치게 빠른 기술적 변화에 따른 소외 역시 심해지며, 신체 능력까지 떨어지는 데다가, 멀게만 느껴졌던 죽음이라는 삶의 유한함까지 인식하게 되니 그 실존적 불안이야 두말하면 잔소리이기는 하다. 게다가 지나온 시간 속에 쟁여 놓은 삶의 회한까지 불현듯. 시시때때로 들이닥치니 이런저런 근원적인 불안이 어찌 없을 수 있을 것인가.



불안은

인간 존재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이 불안을 어찌한단 말인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불안을 느끼고, 그 불안을 안다는 것, 자체가 어른으로서 성숙한 삶을 살기 위한 기초가 된다고 하니, 조금은 위안이 된다. 불안은 살아 있는 한 누구에게나 공평한 ‘인간 존재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불안한 이유는 선택의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자유롭다면, 불안은 필연적이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방치할 수도 없는 것이 불안이니,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자신의 생각, 행동)과 통제할 수 없는 것(타인의 생각, 과거, 운명)을 구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불교적으로는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을 때, 마음이 고요해지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까지 살아오면서 세상으로부터의 기대 심리, 속물주의로부터의 시선, 삶의 불확실성, 게다가 격심한 경쟁 등의 이유로 얼마나 많은 고통과 불안을 겪어 왔더란 말인가. 성공해야 한다는 기대로 인한 강박, 많이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받은 사회적 멸시와 차별,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에 대한 불안,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하는 지나친 경쟁은 그 자체로 ’불안 만땅‘의 요소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그리고 문득,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의 시선에 둔감해지고, 반드시 이기기 위해 악다구니를 쓸 필요도 없고, 어찌 되겠지, 하는 긍정적인 사고로 마음의 지평을 넓히고, 그냥 지금의 ’나‘여도 괜찮다는 것을 배우며, 한 뼘씩 ’커 가는‘ 여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비록 조금은 부족할진 모르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는 자존감, 내지 자부심까지 보태서 말이다. 실상 나보다 좀 더 나아 보이는 그들도 껍질 한두 겹만 벗겨보면 도긴개긴 별 차이 없으니, 그리 부러워할 일도 아니다. 내가 하는 고민, 그들도 백퍼~ 하고 있다는 데 오백원 건다.^^


정신의학 분야의 태두인 융(Jung) 역시, '사회적 성취가 중요했던 인생 전반부와 달리, 중년 이후의 후반부는 그동안 쌓아온 성공이나 역할이 더 이상 내면의 허기를 채워주지 못한다'고 밑줄 좍~ 동그라미 휙~ 그리며 강조했으니, 믿어 볼 일이다. 그러니 비교하고, 비교당해서 기죽지 말고, 상처받지도 말지어다.


그 대신, 젊은 시절 가족을 부양하느라, 자식들 뒷바라지하느라 애써 감춰놓았던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면서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니 죽고 사는 문제도 조금은 제쳐두자. 오래 사는 것보다, 잘 살다가 잘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니 말이다,


굴업도의 사슴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것


다만, 중년의 불안은 위기가 아니라, 외부 성취에서 내면의 성숙으로 나아가라는 '영혼의 초대'라는 조언에는 귀 기울이면 어떨까 싶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어른이 되어간다는 뜻이니 말이다.


어른이란 단순히 나이가 든 사람이 아닌, 자신의 행동과 선택에 책임을 지며 성숙한 내면을 갖춘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그렇듯 어른은 타인을 배려하고 지혜를 나누며, 스스로의 자존감을 지키는 내적인 힘을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나이에 상관없이 배움을 멈추지 않는 성숙한 존재가 바로 어른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가 지금까지는 가진 것, 이룬 것의 크기를 재는 삶을 살아왔다면, 중년 이후의 삶에는 지혜와 품위, 배려 등 내면의 크기를 재며 살아야 한다는 당부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무엇을 이루었는가‘를 따지기보다,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갈 길은 멀고, 명확한 답도 없지만 말이다.



내가 아니면

누가 나를 사랑하겠는가


부조리의 작가인 카뮈(Camus)는 ‘무언가를 꼭 이루어야만 가치 있는 삶이라는 생각 자체가 하나의 허상일 수도 있다’고 했었다. 설사 세상의 관점에서 특별히 이룬 것이 없더라도, 삶의 허무를 인정하고, 날마다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가장 위대한 승리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말한다. ‘성공‘이나, '완성'이라는 강박 대신, 현재를 성실히 살아내는 '창조적 태도'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은 기대를 낮추라는 말이 아닌 방향을 바꾸라는 말이기도 하다. ’더 많이, 더 높게‘가 아닌, 내가 누구인지를 묻는 시간을 많이 갖는 방향으로 사고 전환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비록 남들이 보기에는 부족할지 모르지만, 그 부족한 나를 꼭 껴안고,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으며 묵묵히 걸어가는 것….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하겠는가? 그렇다면, 불안을 줄이는 방법도 나를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아마도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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