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풍 편지】 ‘살아있음이 성취다’

by 박대영


안개 속을 걸어가는

나그네


겨울이 두어 발짝 너머에서 기웃기웃 눈치만 보는 어느 아침, 산과 산 사이에 안개가 자욱하다. 안개가 이것과 저것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탓에 세상은 높고 낮고, 가깝고 멀다는 인식 자체가 사라진 적멸(寂滅)의 공간…. 하지만 누군가는 보이지 않을 때 보인다고 했던가. 눈을 감을 때 그리던 대상이 더 도드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안개가 드리운 풍경 속에 감춰진 오두막살이가 그렇다. 멀리 바라봐야 할 대상이 사라지니 바로 곁의 나만이 오롯해진다. 내가 이곳에 살아있구나. 내가 지금, 이 순간, 살고 있구나. 바보 도(道) 터는(?) 소리 같은 이 느닷없는 자각….


그래서인지 문득, 결국 우리네 삶이 안개 속을 걸어가는 나그네였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그래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허둥대고 종종거리며 걸어가는 한 무리의 나그네들…. 그렇게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면서 걸은 걸음걸음의 총합이 우리의 삶이 되었구나, 하는 각성은 덤이다.


하지만 가고자 했지만 아쉽게도 도달하지 못했던 수많은 시행착오와 좌절마저도 오리무중(五里霧中)의 틈새에서 어렵사리 길어낸 자신만의 삶의 궤적이었으니. 이 어찌 무의미하다 할 것이며, 소중하지 않을 것인가.


봉화에서 농사짓던 전우익 선생 같은 분은 자신의 삶을 ‘한쪽 발이 망가진 자라가 절뚝절뚝 기어가며 남긴 어지러운 발자국같이 볼품없는 것’이라고 겸손해하셨다지만, 그래도 그것이 무엇이든 중요한 것은 남은 발자국이고, 그 흔적이며, 살아낸 시간의 연속성이다. 그 지난한 흔적만이 살아왔고, 살아가는, 또 살아갈 이유가 되는 까닭이다.


우리는 흔히 삶을 이야기할 때 ’성취‘, 즉 무언가를 이루며 사는 삶을 소망하며, 경쟁을 당연시하며 살아왔다. 좋은 학교를 가고, 좋은 직장을 갖거나 또 성공하거나, 그래서 돈이든 자리든 많고, 높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목적 중심의 사고를 애지중지하면서 그렇게….


물론 팍팍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가진 이들의 여유가 어찌 부럽지 않을 것인가.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깨닫는 바는 그렇다고 조금 덜 가진 우리가 그렇게 기죽을 일도,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저마다 자신만의 삶을 살아왔고, 또 반추해 보면 우리도 나름 그만하면 괜찮은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할 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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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흐름이며,

매 순간 스스로 창조하는 여정이면서 예술


삶은 쌓이는 것이 아니라 피어나는 것이라 했다. 삶이란 매 순간 새롭게 등장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은 죽는 그날까지도 완성되지 않고, 다만 완성을 추구하는 과정일 뿐이며, 우리는 다만 그 과정과 그 과정 안에 담겨있는 ’자유‘와 ’가능성‘이라는 씨앗을 꽃으로 피우기 위해 나름 분골쇄신(?), 뛰어가는 중이다.


그래서 니체(Nietzsche)는 ’삶은 정해진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직선적인 여정이 아닌 곡선의 흐름이며, 매 순간 스스로 창조하고 넘어서는 여정이면서 예술‘이라 했을 것이다.


예술은 다의적(多義的)이다, 그래서 완벽하지 않다. 그것은 보는 이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미완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삶도 그렇다. 삶에 경중(輕重)과 미추(美醜)가 있을 수 없는 이유다. 돌을 쪼고, 붓질을 하고, 현을 뜯고, 북을 두드리는 과정만이 오롯하니, 그것은 그것대로, 이것은 이것대로….


삶이란 그저 숨 쉬고, 사랑하고, 아파하고, 넘어지고, 그러다 다시 일어서는 그 모든 순간의 합주다. 그런 이유로,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명백한 성취는 ’삶이 멈추지 않았다‘는, 그래서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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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부조리하지만,

그 부조리 속에서라도 살아내야 한다


살아만 있으면, 그 삶을 유지하기만 하면 삶은 또 이어지고, 그 여정 속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이루고 또 무너뜨리는,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카뮈(Albert Camus)가 말하는 ’삶은 부조리하지만, 그 부조리 속에서라도 살아내야 한다’는 당부는 언제나 옳다.(그렇게 믿는다.)


비록 부조리라는 삶의 무의미함이 짓누를지라도 용기 있게 직면하고, 그 삶을 끝끝내 포기하지 않고 버텨내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살아만 있으면, 살아만 있으면 그걸로 됐다’는 딸에 대한 어느 엄마의 절규가 아름다운 이유다.


물론 살아있음은 유한하다. 그래서 삶은 어쩌면 찰나적 순간이지만, 그럼에도 지금 우리가 내쉬는 이 숨, 이 감정, 이 느낌과 생각은 특별하고 소중하며, 그런 이유로 끝나는 그 순간까지 힘찬 강물처럼 흘러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흐르는 것이 아닌, 그저 살아 있기 위해 흘러온 긴 흐름이라는 사실을 음미하면서 말이다.


붓다는 삶은 도달해야 할 목적이 아니라,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그 자체로 기적이라고 했었다. 그것은 비록 사소하고 하찮을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사랑해야 하고, 그것이야말로 삶을 제대로, 용기 있게 대하는 우리의 자세이자 의무라는 조언이다. 삶에 대한 긍정만이 우리를 살아있게 하는 이유라는 말이다.


굴러떨어질 것이 뻔한 바위를 다시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그 고되고 힘듦을 묵묵히 감당하는 시지프의 자세처럼…. 한마디로 표현하면 ‘좌절 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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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음과

책임


물론 전제는 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갖는 것이고, 그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에 따르면 ‘우리가 선택하는 모든 행동은 단순히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본보기를 선택하는 것’이기에 엄청난 무게를 지닌다고 한다. 그러니 선택의 자유를 오용해서도, 함부로 살아서도, 공동체에 누가 되는 삶이 되어서도 안 된다는 충고이자, 경고는 어쩌면 당연하다.


그리고 또 하나, 니체의 관점…. 바로 아모르 파티(Amor Fati)다.


아모르 파티는 수백, 수천 번을 다시 태어나도 다시 살고 싶을 정도로 현재의 자기 삶의 모든 순간(고통, 아픔, 사랑 등)을 긍정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정언 명령이다.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주어진 운명을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운명애)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는 것이며, 그 책임 있는 자세가 바로 '살아 있음'의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랑하라. 그대 삶의 모든 순간, 그것이 무엇이든 사랑하라. 그것이 그대의 삶이었으니, 그저 또 사랑하라.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울고, 또 웃어라. 그리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숨을 쉬고, 이제는 걸어라. 또 어디론가 나아갈 수 있으니, 아직 살아있으니 기적이다. 그 기적을 즐기며, 행복해라. 다만 살아있음에 대한 책임은 잊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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