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산골의 오두막에 머물 때면, 새침하게 지나가는 바람에도, 삐죽대는 한 조각의 햇살에도 뜨거운 정분(?)을 느껴 툇마루로 뛰어나가 두리번거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지나가는 바람이며 햇살이며, 흔들리는 모든 것들을 붙들고 속닥속닥 헛웃음 나는 수작질만 늘어간다. 그러다가 수작질마저 심드렁할 즈음, 새삼 내가 있는 자리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여기가 변방(邊方)이구나, 내가 이곳에 있구나.’
모두가 가운데, 더 나은 자리,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애쓰는 시대에 변방이 가당키나 할까마는 희끗해진 머리카락마저 빠져 듬성듬성한 머리통이 시린 누군가에게는 변방이라는 가장자리가 어쩌면 가장 편한 자리였구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하기야 살아온 여정 자체가 변방에서 변죽만 울렸던지라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지만 말이다.
신영복 선생은 변방이야말로 ‘자유로운 공간’이라고 했었다. 변방을 자처하면 굳이 비굴해질 이유도 없고, 더 나은 것을 탐하지 않으니 누군가와 다툴 일도 드물고, 게다가 주목받지 않는 가장자리의 여유까지 누릴 수 있으니, 그것이야말로 자유가 아니겠느냐고 말이다. 모두를 이롭게 하고, 앞을 다투지 않고, 가장 낮은 곳에 머무는 물이 최고의 선(上善若水)인 이유와 마찬가지다.
선생의 말대로, 자유(自由)란 ‘자기(自)라는 이유(由)’로 걸어갈 수도,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라면, 변방은 자유의 여정에 딱 맞춤한 터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변방이야말로 어디든 떠날 수 있는 출발선이면서, 소요하듯 걷다가 눈물 한 웅큼 흘려도 괜찮을, 자유를 꿈꾸는 자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면서, 해원의 깃발이고, 노스탤지어이니 말이다.
그래서 변방은 창조의 자리이기도 하다. 자기라는 이유로 살 수 있을 때, 자기라는 이유로 세상에 얽매이지 않을 때, 우리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생각할 수도 있고, 그 결과로 무언가를 끄적일 수도, 솜씨 좋은 누군가는 무언가를 빚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멍하니 하늘을 보다가 몇 자 끄적이고, 계절이 풀릴 때에는 몇 평 되지 않는 텃밭을 일구고, 농작물이 자라는 그 풍경마저도 어설픈 농부에게는 천지창조라도 되는 양 가슴이 뛴다.
고백하자면, 안 그래도 변방에서 변죽만 울리던 나에게는 ‘낮에는 밭 갈고, 밤에는 별을 헤며, 어느 때엔 길을 걷고, 그 걸음 이후를 세상과 더불어 나누고 싶다’는 나름 허랑방탕한, 한편으론 스스로 주제 파악이 잘 된 삶의 표지(標識) 같은 게 있었다. 무위도식의 삶을 동경했으니, 소망이라면 소망이랄 수 있는 그 바람이 맹랑하지만 말이다.
다행히도 그 맹랑한 바람대로 길을 걷다 보면, 걷는 수고로움을 기꺼이 마다하지 않는 나를 깨닫고, 길이 몸을 통해 전해오는 이야기를 들으며, 눈으로는 자연의 풍광까지도 맘껏 담을 수 있으니 이만하면 결의여풍(缺衣餘風)의 삶일지언정 충분히 훌륭한 것이 아닌가, 하는 자족 내지 자뻑(?)까지도 하게 된다.
결국 산다는 건 '가진 것의 크기‘가 아닌 '누리는 것의 깊이’가 중요할 수도 있다는 소소한 깨달음까지 얻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하지만 몸으로 체득되지 못한 입벌구의 값싼 찰나 같은 깨달음이라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말이다.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이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 했으니 더욱 그렇다.
자유를 이야기하면서 문득 깨닫는 바는, 새의 자유를 동경하면서 새를 잡아 새장에 가두었던 우리네의 어리석은 행동들이 새삼스레 되돌아 보인다는 사실이다. 동경했던 것은 단지 새의 멋진 자태가 아닌, 끊임없이 퍼덕이는 날개짓과 그 속에 담긴 에너지, 그리고 창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새의 자유로움이었건만, 우리는 그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채 자신을, 타인을, 새장이라는 세상의 좁은 틀 안에 가두려고만 했으니 말이다.
자유는 자기라는 이유로 걸어갈 수 있는, 그래서 스스로 길을 정하고, 떠날 수 있는 그때에 홀연히 길을 나설 수 있는 열정이었음에도,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거울 속 자태에 넋이 빠져 스스로 날 수 있다는 사실도, 창공을 가르며 비상하는 자신의 모습마저도 잊은 채로 살아왔다는 생각에 자꾸만 아쉬워지는 것이다. 세상이 그려준 작은 새장 속의 안주에 취해서 말이다.
일상의 자잘한 근심일랑 내려놓고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멈춤과 쉼이 필요할 때 떠날 수 있다는 것, 떠날 수 있으면 자유다. 때론 자신을 옭아맨 세상과의 단절이, 그들이 쳐놓은 그물을 벗어나는 것이 힘들지라도, 그래서 산다는 것이 가끔은 눈물 나게 안타까울지라도, 삶이 원래 그런 것이고, 자유가 또 그런 것임을 어쩌랴.
괴테의 말처럼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이다. 어쩌면 변방으로 물러나는 것도, 자유를 향한 열정마저도 노력하는 한 인간의 투쟁적인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래서 하게 된다. 설사 그것이 방황으로 비칠지라도 말이다. 그것이 ‘새로운 나’를 찾아가는 일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