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풍 편지】 - ‘인공위성의 사랑’

by 박대영

한가로운 주말 오후의 일상이 조심스레 지나간다. 추운 날씨 탓에 몸은 잔뜩 웅크린 채로 다소 얼빠진 표정의 심드렁한 시선만이 썰렁한 창밖을 어슬렁대다 이내 코를 쑥~ 빠트리고... 여기도 기웃, 저거도 기웃, 바람마저 얼어 부서지는 하얀 골목길엔 적막한 공허만이 고드름처럼 뾰족하게 날을 세워 그 어떤 움직임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양 그 기세가 요란하고, 또 무겁다.


그 기세가 시려 눈을 돌리면, 하릴없이 우물쭈물하던 시선은 이내 좁고도 괴괴한 움막 안을 더듬는다. 천창(天窓)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시퍼런 하늘을 닮은 푸른 빛살에 살며시 마음을 녹이다가, 문득 빛과 어둠의 사이, 그 경계의 틈에 웅크리고 서 있는 이빨 빠진 아이의 엉성한 웃음마냥 헐렁한 책장이 서글퍼 안쓰러워진다.


관심 부족, 책과 나 사이의 격조함에 미안해지려던 찰나, 마침 갇혀 있는 자의 숙명이랄까. 남아 있는 시간들의 아우성에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던지라, 저 중에 뭐라도 읽어야 하나? 그렇게 손에 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스푸트니크의 연인》


《스푸트니크의 연인》은 고독한 세 남녀의 엇갈린 사랑과 상실, 그리고 존재의 본질적인 외로움을 다룬 작품이다. 한 남자(나)와 한 여자(스미레), 그리고 그 여자가 사랑하는 17세 연상의 여자(뮤)에 관한 이야기가 소설의 얼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스푸트니크'.


스푸트니크는 ‘여행의 동반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인류가 최초(1957년)로 우주에 쏘아 올린 소련(러시아)의 인공위성이다. 지금이야 하늘에 수천, 수만 개의 인공위성이 맴을 돌고 있지만, 맨 처음 홀로 우주로 날아간 스푸트니크에게 우주란 그저 막막하고 외로운, 그래서 무시무시한 낯선 공간이 아니었을까? 그 캄캄했던 스푸트니크의 고독이 우리네 삶과 소설 속 주인공들의 외롭기만 하던 사랑과도 닮아 있었던 것이다.


인공위성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궤도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다. 그 무한반복의 길을 외톨이로 떠가는 스푸트니크의 절망은, 그래서 아프고, 또 암담하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 위를 걸어가는 우리네 삶처럼…. 누군가와 함께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혼자일 수밖에 없는 고독한 여정이 우리네 인생인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 고독한 인생에 한 줄기 서광이 비치니, 그것이 사랑이다.


살아간다는 것이, 그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스푸트니크처럼 ‘외톨이로 빙글빙글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불쌍한 금속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면,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깜깜하고도 고독한 우주에서 만나는 한 줄기 빛은 그야말로 복음이지 않겠는가. 그러니 얼마나 소중하고, 절박할 것인가.

그래서 사람들은 그 길고도 외로운 여행을 감내하고, 그 길의 끝에서 만나는 한 줄기의 빛에 행복해하는 것이다. 나 아닌 다른 이와 나누는 교감과 연대 의식, 그 뿌듯하고 충만한 감정만이 외로운 존재에게 살아갈 힘을 주니 말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이면서, 존재의 근원이 된다. 탄생과 죽음 사이의 긴 여백을 채우고,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특별한 감정으로 사랑(그 대상이 누구건…) 말고 또 무엇이 더 있더란 말인가.


그래서 사는 동안, 그 세월의 더께가 두꺼워지면서 그 대상이나 감정의 강도는 조금씩 바뀌어 가지만, 인간에게 사랑은 언제나 목마른 이상(理想)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존재여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이 어디 그렇기만 하던가?


스푸트니크의 사랑이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이유는 다가가고자 하지만 다가갈 수 없는 평행의 거리 때문이다. 지구는 스푸트니크를 끌어당겨 멀어지지 않게 하면서도, 딱 그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며 다가오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다가갈 수도, 다가오지도 않는 평행의 철길처럼 서로 수만 km의 거리를 두고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그렇게 각자의 궤도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 그들의 사랑이 비극인 이유다. 그래서 스푸트니크는 이 막막한 그리움이 미치도록 절망스러운 것이다.


아무리 깊이 사랑하고 서로를 갈망해도, 각자는 결국 각자의 개별적인 고독한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 각성 앞에서 인공위성도, 우리도 절망하는 것이다. "우리는 멋진 동행이지만, 결국 각자의 궤도를 도는 고독한 금속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자각이 가슴을 치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게다가 인공위성은 자신의 의지대로 방향을 바꾸거나 멈출 수도 없다.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말이다. 선택이 아닌, 어쩔 수 없이 빠져버린 필연적 사랑 앞에서 중력과 관성이라는 이끌림에 의해 궤도를 끝없이 돌아야만 하는 것이, 그의 운명이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운명적 구속’ 앞에서 그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공위성의 사랑이 더욱 비극적인 이유는 평행의 거리도, 돌고 도는 운명적 구속마저도 감당하려 하지만, 결국 그 사랑마저도 언젠가는 소멸해 버린다는 사실이다. 임무를 끝낸 인공위성의 운명은 지구에 닿기도 전에 대기권에서 타서 재가 되어버리거나, 그도 아니면 영원히 우주의 미아가 되어 더 먼 우주를 떠돌기 때문이다.


사랑의 끝에 매달린 상실의 아픔이 그러할 것이다. 뜨겁게 타올랐던 감정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차가운 우주의 정적…. 서로를 간절히 바라보며 주위를 맴돌지만, 끝내 서로의 중심에 가 닿지 못하는, 그래서 각자의 고독 속에서 소멸해 가는 운명이 인공위성의 사랑이었으니, 이를 어쩔 것인가.


하루키는 이 멀고도 먼 사랑의 순간마저도, 우연히, 그리고 잠시 잠깐이라고 말한다. 마치 인공위성이 궤도를 돌다가 잠시 잠깐 한 지점을 통과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삶이란 어쩔 수 없이 고독할 수밖에 없는 여정이라고 말한다. 또 어쩌면 사랑하여야 하는 삶이기에, 그 사랑으로 인해 외롭고 고독해져 버린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은 아니었을까. 사랑이 없었다면 외로움을 인식조차 하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결국, 삶은 홀로 뛰거나, 걸어가는 길 위의 여정이다. 그 길 위에서 가끔은 사랑이라는 즐거운 동행을 만나기도 하지만, 본질은 혼자서 걸어가는, 아니 걸어가야만 하는 존재가 스푸트니크이면서 우리 자신은 아닐까.


서정윤 시인은 그의 시, 《홀로서기》에서 홀로서기는 "둘이 만나 서는 게 아니라, 홀로 선 둘이가 만나는 것“이라고 정의했었다. 진정한 만남이란 각자 홀로 선 둘이 만나는 것이라는 의미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스스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먼저라는 말이다.


스푸트니크도 알고 있었을까. '인생이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여정도 아니고, 달리 도달해야 할 특별한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닌, 단지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아쉽고 안타깝지만, 나 아닌 타인과의 어쩔 수 없는 간극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 그러니 그저 가보는 수밖에…. 두려움 없는 담대함으로…. 한 발, 또 한 발~~ 내딛다 보면 또 언젠가, 어딘가에 닿아 있을 거라 믿으며….


그러다가도 놓지 못하는 질문 하나.


"우리는 왜 이렇게까지 고독해져야만 하는 것일까? (......) 어째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고독을 품은 채, 인공위성처럼 아무 말 없이 스쳐 지나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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