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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bo Jun 29. 2021

미용실과 진료실의 상관관계

첫 글♡

오늘 허리까지 기르던 머리카락을 1년 만에 끊어냈습니다.

한동안 코로나를 핑계로 기쁘게 미용실 출입을 중단했더니, 진갈색 머리카락은 내 어깨를 넘기고, 어느샌가 내 가슴을 넘겼습니다.


그러던 어제 우연히 백화점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은 과히 충격적이었어요.


여리여리한 목덜미 뒤로 진갈색 긴 컬 머리를 귀 뒤로 넘기는 미모의 30대 여성까지 생각한 건 아니었어요.

(내마음속의 느낌 직접 그려보았습니다.)


저도 양심은 있다고요.


그렇지만 둥실둥실한 얼굴에 두툼하고 넉넉한 목 뒷살에 포동포동한 팔까지, 코로나 핑계로 운동은 멀리하고 즐긴 음주가무가 새겨진 유리창에 비친


 ' 넌 도대체 누구냐?'


완전 낯선 아줌마가 태초의 원시인처럼 또는 해리포터의 해그리드처럼 유리창 앞에 서 있었어요.


저 꼴에 긴 컬 머리가 더해지니 호적 메이트 친오빠가 긴 가발을 쓰고 있는 줄 알았어요.


이제 관리를 하지 않으면 호적 메이트와 구분이 가지 않을 나이가 되어 버린 겁니다.


압도적인 충격.


착잡한 마음으로 네이버로 가장 좋은 평점, 당장 예약이 가능한 근처 미용실을 수색했습니다.


예약 버튼 누르고 한숨,, 후,,,


사실, 전 미용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돈 주고 혼나러 가는 느낌이랄까요?


머리카락이 얇아서 펌 안 먹히는 거 알죠?라는 말을 십수년을 듣고 살았는데 나만 그런가 했더니,


 반곱슬에 숱 부자인 친구는 미용실에 들어서는 순간 여기저기서 나오는 탄성 소리를 듣는다고 하는군요.


'찾으시는 디자이너 선생님 계세요?'

 도 참 부담스럽습니다.

'아는 디자이너 선생님은 없는데;

그냥 잘하시는 분으로 부탁드려요'하고 앉습니다.


그리고 자리에 앉으면'원하시는 스타일 있으세요?'하고 물어봅니다.

수줍게 주섬주섬 꺼낸 캡처 사진을 보여 드리면 십중팔구 이렇게 말씀하시죠.


'고갱님, 이건 드라이예요'

'(사진 밑에 빌드 펌이라고 되어 있는 거 캡처해왔는데..)


네, 그럼 자연스럽게 세팅펌해주세요;.'


아 그리고 머리 상한 부분 잘라달라고 하면 이렇게 된다지요?

저도 상한 부분 다 자르면 투블럭해야해서 그 말은 하지 않습니다. 허허;


그리고 샴푸를 하고 나서 내 머리를 만지시는 원장님.

환불 원정대 느낌의  화장을 한 원장님의 호구조사가 시작됩니다. 심심하지 않게 말 걸어 주시는 거지만 저 같은 mbti유형은 쉽게 쫄아버립니다.


'언니, 무슨 일 해요? 내가 맞춰 볼까?'


....(그냥 숨만 쉬는 닝겐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냥


 '지.. 직장인 예요.'


하고 대답하고 오지도 않은 카톡을 만지작거려 봅니다.


자, 이쯤 되면 전 그냥 마네킹이 되고 싶습니다.


저처럼 이런 스몰토크가 괴로운 분들 있으신가요?


저에게 제일 괴로운 순간을 꼽으라면 치과의자에 누워서 도포를 뒤집어쓸 때와 이렇게 미용실 의자에 앉아있을 때입니다. 


괴로움의 의자들이죠.


그래서 저는 오늘처럼 미용실을 미루고 미루다가 태초의 모습과 가까워지면 어쩔 수 없이 예약을 합니다.


오늘 크게 숨을 들이쉬고 이 멋들어진 미장원 문을 여는 찰나, 이유도 까닭도 없이 내 진료실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환자분들이 순간 겹쳐 떠올랐어요.


처음 진료실에서 000 과장이라는 명찰이 새겨진 가운을 입고 모니터 앞에 앉았던 '나'는 참으로 참을성이 없었어요.


어디 불편하시냐고 물어보면 할머니들은 20년 전 아팠던 것부터 말 꺼내기 시작합니다.참다 못한 그때의 나는 지금! 지금 당장 불편한 게 뭐냐고 형사처럼 캐묻고 또 캐물었습니다. 그렇게 해야 돕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난 당장 답을 찾아야 해!라는 생각이 강했달까요.


지금도 사실 내 앞에 앉아서 얘기하시는 것을 들으면


 '저 환자분이 진짜 힘드신 건 뭘까?

본인은 모르시지만 연관된 이런저런 증상들이 있지 않을까? 가족 중에 이런 증상이 있으실까?

혹시 머리를 부딪치거나 심한 운동을 한적은 없으실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지만 그래도 적어도 3분간은 환자분의 말을 끊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미용실에서 느끼는 불편함을 사실 환자분들진료실에서 비슷하게 느낀다는 것을  알게되어서 입니다.


처음 진료실 문을 열면 왠지 차가워 보이는 가운에 안경을 쓴 의사 선생님이 보입니다. 하고싶은 말은 많은데  할 말이 조리 있게 생각나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나라 진료시간은 짧은데, 이 짧은 시간 안에 래퍼가 아닌 이상 모든 불편함을 충분히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들어오시면 시작은 이런 말 저런 말 오락가락 하시는 것이 진료의 기본값입니다.


뭐, 우선 어디가 불편한지 말을 시작하고 그것을 들으며 서로 랍보라고 하는 관계를 맺는것에 그 의의가 있습니다.


미용실 문을 열 때 나의 그 불편함이 환자분들의 눈빛에서 보이면 저는 그저 적어도 몇 분간은 말을 끊거나 자르지 않고 최대한 성심껏 들어 드리려고 합니다.


의사는 환자분들의  종잡을 수없는 말로 표현하는 증상을 하나로 모아서 그 안에 진짜 문제가 있어서 검사해야 하는 것과 그냥 봐도 되는 것들을 구분하는 걸 도와드리는 게 일이니깐요.


사람의 말을 중간에 말을 끊으면, 수돗물이 졸졸 끊기듯이 진짜 중요한 병의 단서가 나오지 않습니다.


의사는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많은 환자와 인연을 맺으면서 깨달았습니다.


의사는 정말 잘 들어드려야 하는 직업이라는 것을요.


오늘 간 미용실 원장님은 네이버 평에서 대다수 좋은 평이었지만 그 가운데 '무슨 우환에 걸린 사람처럼 눈치 보이게 조용하다'는 악평이 하나 적혀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그 말에 동의할 수가 없었어요.


그녀는 나에게 머리가 얇다고 혼내지도 않았고, 기장 추가에 영양은 뭐뭐는 꼭 해야 만한다고 강요하지도 않았지요.


단지 30분간 몇 가닥 없는 내 머리카락을 요리 잡고 저리 잡고 단발로 다듬고 열심히 컬을 말았습니다.


오랜 시간 거울을 보고 앉아 있다 보니 몸이 뒤틀리긴 했지만 그 너머에 원장님이 최선을 다하는 게 보였죠. 호구조사 없이 필요한 말만 해서 나름 편안하기도 했습니다.


아 그래서 결과는' 단발 컬은 성공했냐고요?'


아니요, 파래같이 흐물흐물한 내 머리카락은 역시나 강한 컬을 거절했지요.


초등학교 음악책에 나오는 단발머리 모차르트에 컬이 덜 들어간 모습 같은데, 뭐 괜찮습니다.


원장님은 미안하신지 '혹시 샴푸 후에 컬이 너무 풀리면 다시 오세요, 그냥 다시 해드릴게요' 그랬지만요.


그래도 저는 지금 이 컬이 덜 말린 모짜르트 머리가

 꽤 마음에 들어요.

꿀꿀스러운 내 얼굴이 작아 보이기도 하고 적어도 3시간 동안 미용실에 앉아있던 시간이 괴롭지가 않았어요.


거기에다 말을 많이 한다고 사람 마음이 열리는 게 아니라는 것,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은 무시할 수가 없다는 걸.

 새삼 깨달은 3시간이랄까요.


왠지 미안해하는 원장님께 다음 예약 걸고 갈게요!

 라고 3개월 후로 예약을 걸었습니다.




내 환자들도 이런 편안한 기분으로 진료실 문을 나섰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저는 조용히 미용실 문을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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