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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식성 경청꾼 Feb 02. 2023

꿈 앞에서 어정거리는 이들을 위한

긴긴밤(루리)을 읽고

  3년 전, 시아가 흐려진 뒤부터 밤잠을 자주 설쳐왔다. 시각장애 탓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한낮에도 밝지 않은 시아가 신체리듬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닐까 싶은 우려에 이불을 더욱 뒤척인다. 잠 앞에서 어정거릴 때면 밤은 영원처럼 길어진다. 그러다보니 단 세 글자인 서명에 더욱 손이 끌렸다. 다시 말해 해당 작품이 미술 이론을 전공한 작가의 동화인지, 제21회 문학동네 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인지도 모른 채 책을 읽었다는 것이다.

작품은 이름 없는 주인공 펭귄이 바다 앞에 선 장면과, 노든이라는 늙은 코뿔소가 인간 사이에서 삶을 마무리하는 장면을 교차하여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리고 노든의 첫 기억에서부터 삶을 따라가며 이야기가 흘러 다다르는 첫 장면을 마지막에 수미쌍관으로 보여주며 끝맺는다.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초반부터 독자와 애착을 형성한 노든이라는 캐릭터의 꿈을 중반 이후에 등장한 주인공이 대신 맺어주며 'The circle of life’를 실감토록 만든다는 점이다. 코끼리의 아들이었고 코뿔소로서 가정을 이루었으며 펭귄에게 기꺼이 아빠가 되어 주었던 노든도, 버려진 알로 처음 등장하여 우여곡절 끝에 바다에 다다르는 이름 없는 펭귄도 '삶의 고리'에 묶여 있다.


  주인공은 누군가의 몫을 살아내는 것이 아닌 스스로 살고 싶어서 악착같이 살아 내왔다고 밝힌다. 적어도 노든의 이야기를 들으며 긴긴밤을 달랠 때만큼은 그러했으리라. 하지만 노든을 남기고, 먼 바다로 떠나는 길목 앞에서 비로소 치쿠와 윔보, 노든과 그보다 먼저 떠난 그의 아내와 딸, 그들 모두의 삶의 무게로 자신의 삶을 디디고 있음을 실감한다. 많은 이들의 삶과 죽음이 주인공을 수평선 앞에 서도록 이끌었던 것이다.


  이렇듯 이 작품은 연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가족과 친구를 잃었던 노든이 인간들 사이에서 여생을 보내듯, 아무도 곁에 없었다면 알에서 깨어 나오지도 못했을 주인공이 절벽을 올라 다른 이들의 몫을 살아낸다. 꿈을 이루지 못해 긴긴밤을 어정거릴 때 잠에 들어 꿈에 이르는 일과도 멀어질 테지만 연대의 의미는 오히려 그 때 빛을 발한다. 스스로 바다라는 미래를 꿈꾸는 주인공과 평안한 밤을 꿈꾸는 노든의 연대로 긴긴밤 속에서 꿈을 길어 올린다.


  잠에 들지 못해 어쩔 도리가 없는 긴긴밤은 감당하기 어렵지만 꿈을 이루기 위한 긴긴밤은 오히려 다행인 법이다. 노든과 주인공은 수많은 긴긴밤을 함께하며 노든의 꿈이 인간에게의 복수에서 주인공의 펭귄으로서의 삶을 꿈꾸는 것으로 옮겨가며 오히려 노든에게 삶의 구원이 되었으리라. 노든이 인간과 남기로 결심한 날, 주인공과 마지막 긴긴밤을 함께 보낼 때 자신의 삶을 모두 이야기해주었던 것이 그 좋은 증거다. 노든이 좋은 코끼리에서 좋은 코뿔소가 되었듯, 주인공에게 좋은 코뿔소가 되었으니 좋은 펭귄이 되어보라고 말하는 장면은 자신의 품을 떠나보내는 자식의 아버지로서 최선의 태도로 보인다.


  작품을 읽으며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본 작품이 미술이론을 전공한 작가의 도서인 만큼 삽입된 그림 역시 수준급일 것임에도 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하여 잠이 오지 않을 때는 머릿속으로 작품 속의 장면을 혼자 그려보기 시작했다. '흰 바위 코뿔소의 슬픈 눈에 비친 아장아장 걸어오는 어린 펭귄'의 모습 같은 그림들 말이다.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리다보면 어느덧 그 그림이 꿈이 되기도 한다. 침대에 누워 수평선을 바라보는 절벽 위의 펭귄의 뒷모습을 그리다보면 순간 펭귄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려 따라오라는 눈짓을 보내오고, 어느덧 그 펭귄과 바다를 가르고 헤엄치는 식이다.


 얼마 전 오랜만에 조카와 둘이서 잠자리에 들었다. 부모님이 없이 어린 조카와 둘이 자려니 여섯 살 조카도 쉽게 잠에 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뒹굴었다. 결국 내 품에 안기고는 (평소에 엄마 아빠가 그렇게 해주는지) 옛날 얘기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코끼리 사이의 흰바위코뿔소를 그리다가 머릿속의 붓을 내려놓고 조카를 안았다. 그리고 이내 조카의 긴긴밤을 달래줄 이야기로 까만 밤을 색칠해갔다.


  "바다 건너에 노든이라는 흰 바위 코뿔소가 살고 있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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