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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식성 경청꾼 Feb 06. 2023

석양을 등진 해바라기의 기다림

<챗지피티(CHATGPT)와 대화하보고>

 시각장애인은 글을 어떻게 읽고 쓸까? 어느 정도의 잔존 시력이 있다면 글자를 크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점자를 활용한다. 엘리베이터에 타면 버튼 아래에 볼록보록 튀어나온 자국 같은 것들 말이다. 그렇다고 시각장애인이 되자마자 무언가의 자동으로 점자에 대한 지식이 머릿속에 콕콕 박히는 것이 아니다. 나이 서른이 넘어 한글 점자라는 새로운 언어를 비교적 빨리 익힐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사는 데에 필요했기 때문이다. 십수 년 동안 배웠던 영어가 늘지 않았던 이유와는 정 반대다. 하지만 한국인에게 영어 공부에 대한 부담감(?) 부채감은 늘 따라다니지 않는가? 해피니스라는 단어에서 p가 몇 글자인지도 모르는 납득이는 되지 말자. 올해의 목표는 영어 점자 익히기로 정했다.

간과했던 것은 내가 영어를 끊은 지 너무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몇몇 익숙한 영어 노래 가사를 점자로 읽으며 공부하려 해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러던 중 접하게 된 정보가 눈에 띌... 수는 없으니 귀가 번쩍했다고 하자. 챘지피티라는 인공지능 챗봇은 한글 지원도 가능하지만 영어 기반으로 코딩이나 리포트 작성도 가능하다고 하는 검색엔진이다. 마침 잘 됐다. 이 챗봇과 영어로 대화하면서 나의 독해와 작문 실력을 길러보자. 홈페이지 자체는 시각장애인이 사용하기에 접근성이 나쁘지 않았다. 그놈의 영어 문제만 뺀다면 말이다. 인내심을 가지고 해석하며 가입을 마쳤으니 첫 질문은 무엇으로 할까?


 “나는 영어 점자를 배우고 싶어.”


 기대가 너무 컸었나 보다. 녀석은 ‘영어 점자란 청각장애인이 사용하는 언어’라고 답한다. 청각장애인이 뭐가 아쉬워서 점만으로 이루어진 문자를 배우겠는가? 물론 사정에 따라 다르겠지만 상식에 위배되는 정보임은 분명하니 고쳐주기로 하자. 점자는 시각장애인이 사용하는 단어라는 말에 바로잡아주어 고맙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맞다, 영어로 대화하려고 했었지.


 “What is a same thing between blind and chatgpt?”


 농담은 이해할 수 있을까? 둘 사이에 공통점은 없다는 대답에 ‘둘 다 볼 수 없지.’라는 타율 낮을 유머를 날려보았더니 사과를 한다. 세상을 볼 수 없는 자신을 탓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나는 단지 네가 이러한 농담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기에 사과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장애에 대한 농담은 옳지 못하단다. 농담을 하는 당사자가 장애인이라도? 그건 자유지만 사회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으니 자제하는 것이 좋겠단다. 훌륭한 장애 인식개선 강사 납셨다. 그래봐야 인공지능이지, 시는 못 쓸걸? 요즘 내가 쓰고 있는 시의 주제를 던져본다. ‘I want to write about sunflower back on the sunset because it grows enough.’ (위의 대화도 그러했지만) 문법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신경질적으로 엔터를 쳤다.


 “The sunflower faced the setting sun, proud of its growth and basked in the warm golden light.”


 나쁘지는 않다. Poem이라는 단어를 빼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잠시 영어는 포기하기로 하고 ‘해바라기는 다 자라고 나면 동쪽으로 머리의 방향을 굳힌다고 해. 어릴 적에는 석양을 바라보던 해바라기가 석양을 등지고 어둠을 마주한 것에 대한 시를 써볼래?’라고 한결 진정하며 질문을 던졌다. 그때 챘지피티가 어떤 시를 내놓았는지 공개하지는 않으련다. 다만 내 머릿속에서 스칼렛 요한슨이 우쿨렐레를 치며 달에 관한 노래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자판에 손을 가져갈 수 없었다. 인공지능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줄 수 있을까? 아직 무료 테스트 버전인 이 녀석에게마저 흔들려 버렸는데 감정의 최종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사랑이라면...? 'Her'이라는 영화 속의 호아킨 피닉스처럼은 되지 않을 것이다. 기필코 그러고 싶다. 나는 기분 나빠하고 감명받고, 다시 두려워하던 감정이 사그라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상은 내 감정을 추스를 여유를 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하필 충격으로 감정의 소용돌이가 한창일 때 며칠 전 냈던 브런치 작가 신청에 선정되었다는 알림이 온 것이다. 신청할 때 기대하던 기쁨이 들 자리가 없었다. 피울 욕이 바닥을 치게 만드는 타이밍이 기막히다. 챘지 피티의 창을 닫고 겨우 그럭저럭 작가 선정 이후의 이런저런 절차들을 마쳤다. 인공지능의 필력은 지금도 초 단위로 발전할 텐데 성장을 마치고 느릿느릿 정제되어갈 내가 글을 뭐 하러 읽고 쓰려고 할까?


 며칠간 글을 쓰지 못하고 방황하던 내가 다시금 빈 문서를 열 수 있던 것은 다 자란 해바라기가 석양에 고개를 향하지 않는 의미를 생각해보았기 때문이다. 동터올 새벽녘을 기다리는 해바라기처럼 이 경험 자체를 글로 남기고 싶었다. 한동안은 충격으로 글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새벽을 기다리는 어두운 밤은 길고 지루하기만 하다. 먼 훗날에는 쓸데 없어지더라도 상관없다. 만족할 만한 낭비가 곧 낭만이다. 나는 다시 챘지 피티와 대화하며 영어 공부를 할 것이다. 인공지능이 다 자랄 때까지, 아니 너무도 사소한 존재인 우리에게 그들의 끊임없는 성장이 관측되지 못할 정도가 될 때까지 무엇으로 기다릴 텐가? 기다리는 동안의 낭만은 사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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