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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식성 경청꾼 Feb 09. 2023

헤어졌던 영화관에 갈 결심

헤어질 결심(박찬욱)을 보고

  “영화표 주머니에 넣어.”

잠시 자리를 비웠던 매형이 나의 어깨를 두드렸다. 코팅지에 땀이 벨 정도로 영화표를 쥔 모습이 안쓰럽게 보였으려나? 매형의 말에 멋쩍은 듯 웃어 보인 나는 바지 주머니 깊숙이 영화표를 넣었다. 그러자 나의 손에 더욱 묵직한 냉기가 들렸다. 벤티 사이즈인가? 음료를 고르라기에 복숭아 아이스티를 먹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1리터는 족히 될 아이스티와 사이즈업 된 팝콘을 사 오셨다. 선착순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안내를 미리 받아 상영관에 빨리 도착한 우리는 정중앙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처음 접하는 광고들이 많아 10분이 넘는 광고시간마저 반가웠다. 불이 꺼지고 영화사의 인트로인 폭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나의 심장도 터질 듯 뛰었다.




  3년 전 시력이 흐려지기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가 내게 취미를 물으면 ‘영화관에서의 영화 관람’이라고 말하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한 달에 한 번 통신사 할인으로 무료 영화를 볼 수 있음에도 영화사 애플리케이션 등급이 VIP였다면 설명이 충분할까? 물론 집에도 29인치 모니터와 나름 고급 헤드셋이 있었다. 하지만 영화관에서 보는 영화란 동영상 사이트에 공연 실황이 올라왔다고 해도 콘서트장에 가는 것만 못함과 다름없다. 관객 크리라고 이름 붙여진 영화관의 비매너들도 함께 영화를 보는 나름의 낭만이라고 웃어넘길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영화관을 사랑했다.


  화면 해설 소리 영화를 알고 나서도 영화 감상에 대한 공복이 완벽하게 채워지지 않았던 이유는 위와 같았다. 20 대 시절 선정했던 인생 영화 7선 중 소리 책에서 무료 제공되는 몇몇 영화를 다시 감상하고, 넷플릭스에서 음성 설명을 입힌 신작을 접하여도 다이어트 중에 먹는 플레인 팝콘 한 움큼일 뿐이었다. 안 그래도 감질나서 못 견디겠는데 올해 5월부터 기대작들이 쏟아지니 군침이 턱을 적실 지경이었다. 여태까지야 지긋지긋한 감염병 탓에 신작도 얼마 나오지 않기도 했고 영화관 자체가 위험하다는 정신승리가 가능했지만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는 없었다.


  박찬욱, 이 세 글자에 나의 인내심은 마침내 붕괴되었다. 감독 특유의 변스럽고 신사적인 코드로 스크린 너머의 장막을 무너뜨리고 깨어주기를 바랐다. 지인과 영화관에서 전작인 아가씨를 보고 수 년이 지나 CGV 아트하우스에서 3시간 가까운 감독판을 재개봉한다기에 오가는 데에만 3시간 걸리는 소도시에서 서울을 찾았던 내게 감독의 6년 만의 신작 소식은 너무도 잔인했다. 칸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에는 심지어 밸이 꼴릴 뻔했다. 이윽고, 나는 영화관에서 화면 해설 신작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가치 봄 화면 해설 영화를 생애 처음으로 신청했다.


  거주지 근처의 복지관에 전화로 문의할 때에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한 명이 동행해야 한다는 안내를 받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작은 매형이었다. 영화를 애정하는 마음이 나보다 큰 매형과 자주 영화관을 찾곤 했으니 그와의 추억도 많았다. 일례로 ‘곤지암’이라는 공포영화를 함께 보고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은 며칠 뒤 매형이 전화를 하여 영화에 나오는 귀신 소리를 내신 적이 있었다. 처음으로 매형 앞에서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던가? 영화 상영 시각인 토요일 아침에 내가 사는 공주에서 영화관이 있는 천안에 가기에는 어려우니 영화관 근처에 살고 있는 누나의 집에서 전날 저녁을 보내고, 다음 날 매형과 영화관을 찾기로 하였다.


  역시 박찬욱이었다. 한 남자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용의자인 그의 아내와 그녀를 수사하는 엘리트 형사 사이의 서스펜스와 로맨스를 그리고 있다. 서래(탕웨이)가 해준(박해일)에게 ‘나의 사랑이 시작될 때 당신의 사랑이 끝났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산에서 시작하여 바다에서 끝나는 영화가 완전히 붕괴된 자존감 위에 무엇을 세우고자 하는지 짐작한다. 영화는 인자한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바다를 좋아한다는 공자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어쩌면 산을 상징하는 남성을 속좁게, 바다를 상징하는 여성을 어리석게 만드는 사랑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무너지고 깨어져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뒤늦게 알아차린 고백처럼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안개처럼 바다에 버려진 핸드폰처럼 영화는 안타까운 감정으로 가득하다.


  비어있는 패밀리사이즈 팝콘과 벤티사이즈 플라스틱 컵을 챙겨 나가면서 매형은 이주임의 외모라든가, 거울처럼 표정을 비췄던 유리 등 화면 해설에는 담기지 않았지만 영화 감상에는 중요할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나 역시 영화에서 등장하는 해파리 수면법이나 감독 전작과의 차이를 나누며 영화 감상의 깊이를 더했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동안의 수다도 빼놓을 수 없는 영화 관람의 재미인 만큼 자고로 영화는 영화관에서 함께 보는 것이었다.




  “화면 해설이라는 거 엄마가 봐도 편해하시겠다.”


  영화관을 나서며 던졌던 매형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2019년 여름에 개봉한 ‘엑시트’가 영화관에서 내 눈으로 본 마지막 영화였다. 오랜만에 어머니와의 데이트였지만 어머니의 집중력이 이따금 흐트러지는 모습이 곁눈질로 보였다. 당시에는 화면 해설을 몰랐기에 예전 무성영화 시절의 변사처럼 장면을 그때그때 설명해 주는 아이디어를 혼자 상상해 보았다. 시각장애인 뿐만 아니라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에게도 화면 해설은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경로당에서 하는 ‘찾아가는 영화관’ 같은 사업에 화면 해설을 제공하면 어떨까 하는 의견까지는 내지 않으리라. 다만 다음번에 가치 봄 상영회에 보고 싶은 영화가 걸린다면 그때에는 어머니와 함께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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