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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식성 경청꾼 Feb 17. 2023

그 자체로 즐거운 추론이라면

<요네자와 호노부의 고전부 시리즈를 읽고>

 해당 장르에 대한 내공이 있든 없든 추론 능력에 대한 로망은 누구나 있으리라. 손목에서 거미줄을 발사하거나 다시 태어났더니 재벌 집의 장손이 되어있는 것보다는 사뭇 현실감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물론 우리가 살면서 겪는 사건들이 셜록 홈스나 코난의 그것만큼 충분히 자극적이지는 않다. 물론 그 정도의 뇌섹남은 꿈도 못 꿀 일이거니와 살인사건에 준하는 범죄에 연루되고 싶지도 않다. 결국 평범한 사람이 극한적인 상황에서 손오공처럼 초사이언으로 변신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살해에 준하는 강력 범죄가 등장하지 않는 추리 장르가 가능할까? 나 역시 문외한이었지만 일상의 수수께끼라는 세부 장르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장르의 특징을 영리하게 활용한 작품이 바로 나로 하여금 일주일 만에 7권을 독파하게 만든 고전부 시리즈다. 해당 시리즈에서 등장하는 유일한 죽음의 묘사는 고등학생이 축제에서 발표하기 위한 아마추어 영화에서뿐이었다. 어쩌면 추리 장르에서 기대하는 문제로는 한없이 가벼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해진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여느 추리물과는 달리 질문부터 찾아야 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더군다나 이러한 전개 방식은 자신의 문제를 명제화하면서 풀어가는 우리네 삶과 닮아 있다. 일본의 심문자나 마을축제 같은 고유의 문화가 등장하는 타국 독자로서의 불편함마저 즐길 만한 수수께끼가 되는 순간 작품과 한 걸음 더 가까워진다.
 사소한 일에도 호기심을 아끼지 않던 사춘기를 떠오르게 만드는 이 시리즈는 성장소설로 비치기도 한다. 세상이 온통 신경쓰이는 사춘기란 끊임없이 생겨나는 질문들의 나름대로 답을 채워가며 성장하는 법이다. 사실 현실에서의 질문이란 누군가에게 상처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기에 조심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무례한 질문이라도 받아들여지는 시절이 있어야 한다. 최근에는 익명성이라는 평등에 가려진 인터넷에서의 질문이 답변보다 평가로 되돌아오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질문 없는 성장은 불가능하리라는 너그러움이 필요한 시대이다.
 적어도 시아가 흐려진 뒤 나의 질문에 한결 너그러워진 사람들의 반응은 세상이 아직 따뜻하다는 방증이다. 얼마 전 점심으로 지인과 고기를 구워먹었다. 주문에도 관여하지 않고 그저 고기가 구워지는 동안의 향기로운 냄새에 취할 뿐이었다. 고굽의 고수라면 그 모양만 보아도 얼추 알겠지만 내 질문에 그 누가 부위가 적힌 팩을 던지랴? 또한 추론할 꺼리가 늘어간다는 점도 장점이다. 갈비살을 먹고 지인과 헤어진 뒤에 홀로 산책하는 길에 들려오는 동물의 발 구르는 소리를 듣고, 코를 간질이는 향수 냄새를 맡았다. 곧 나의 종아리에 무언가 부비적대는 느낌이 들었지만 추론한 것이 얼추 맞아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이토록 소중한 질문을 해결해나가는 올바른 방법이 따로 있을까? 이 시리즈 속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네 명이 문제를 찾아 해결해나가는 모습을 보면 각각의 역할을 의인화한 것만 같다.
 먼저 여주인공인 지탄다 에루는 농가 유지의 딸로서 고전부장의 역할을 맡고 있다. 평소 경우가 있고 부탁을 어려워하는 성격과는 달리 ‘저 신경 쓰여요.’라는 한 마디로 거부할 수 없는 행동력이 생긴다. 궁금한 게 생겼다면 정보를 찾아볼 차례다. 후쿠베 사토시는 데이터베이스는 결론을 내지 못한다면서도 쓸모없는 지식에 진심이다. 그가 가진 또 하나의 신념은 농담은 그 자리에서 끝내야, 아니라면 거짓말이 된다는 것이다. 지식이 범람하는 시대에서 그 자리에서 되돌리지 못한 실수가 가짜 뉴스가 된다.
 후쿠베 사토시를 좋아하는 이바라 마야카에 대한 설명은 타로카드의 상징이 정의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겠다. 해결 과정에 있어 비판적인 한편 추진력을 키우는 역할로서 Justice를 definition 하는, 한 마디로 문제의 선을 그어주는 순간이 필요하다. 질문이 생겼을 때 정보를 취합하여 정의까지 마쳤다면 드디어 마지막 단계다. 결론을 낼 때는 시리즈의 남주인공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이 말을 기억해 보자.
 “하지 않아도 될 일이라면 하지 말자. 해야 하는 일이라면 간략하게.”
 오레키 호타루라는 인물은 에너지 절약주의자라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 인물은 흩어져있는 얼개를 맺어내는 데에 능력이 있음에도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굳이 손을 걷어올리는 법이 없다. 설거지는 귀찮지만 누군가 차려준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면 뚝딱 해내는 인물이랄까“ 어떤 이는 귀차니즘으로 자신이 가진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않는 호타루를 롤 모델로 삼는 이를 ‘쿨 진’이라는 한 마디로 치부한다.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추론의 결론을 내릴 때만큼은 쿨 진이어도 좋다.
 왜 하필 결론을 내릴 때에 귀차니즘이 도움이 된다는 것일까? 추론 역시 늘 조심해야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과 가장 멀어지기 쉽다. 반대로 무언가를 사랑할 때면 그것에 대한 궁금증이 한가득이다. 셜록이나 코난은 언제나 범인을 찾아내고 손오공은 적에게 지지 않지만 평범한 우리는 가끔은 틀리기도 한다. 사실 꽤 자주 틀린다. 스스로 잘못된 결론을 인정할 만한 기회 없이 또 다른 무언가와 맞닥뜨려야 한다면 오해할 바에는 그대로 두자. 삶을 살아갈 때 즐겁게 만들 만한 질문 중 가능한 것만 결론지어도 시간은 부족할 테니까. 그 자체로 즐거운 질문이라면 결론은 필요 없다. 이것이 아직 완결나지 않은 이 시리즈를 위한 이 글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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