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잡식성 경청꾼 Feb 24. 2023

굳이 넘어야 할 담

<영탁의 1집 MMM을 듣고>

 “요즘엔 들을 만한 노래가 없어.”
 십수 년 전 발표되었던 에픽하이 4집의 선곡표라는 곡의 한 구절이다. 지인들이 이와 비슷한 말을 할 때면 즐길 만한 노래를 찾아낼 여유가 없는 나이가 된 것만 같아 씁쓸하다. 그렇다고 트로트를 듣기에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언젠가부터 TV만 틀면 트로트다. 종종 들르는 본가의 TV를 어머니께서 트실 때면 항상 그랬다. 최근 영상매체들이 다양해지면서 주 시청층의 연령이 높아진 TV프로그램에 트로트가 필수 요소가 되었다는 기사가 기억난다. 결국 아랫목에 앉아 큰 소리로 종편에 채널을 고정시켜두는 노년의 뒷모습이라는 이미지가 나로 하여금 트로트를 즐기지 못하도록 했다. 나는 아직 10대 시절 한창 들었던 에픽하이가 좋다. 그때 싸이의 오토리버스라는 노래 속 타블로의 가사가 다시 내 맘을 후빈다.
 “듣던 것만 듣고, 보던 것만 보면 늙은 거야.”
 아는 분께서 시각장애인 단체를 통해 트로트 앨범을 가져왔을 때 곧바로 어머니께 전달드렸다. 어머니의 차에는 CDP가 있는 만큼 당연한 선택이었다. 내겐 좋아하던 가수의 실물 앨범 역시 일종의 굿즈 정도였으니 미련은 없었다. 다만 어머니와 함께 앨범을 살폈을 때 손으로 앨범의 두깨를 집어보며 들어간 노고를 가늠해 보았다. 여느 아이돌의 그것처럼 포토카드까지 포함된 정성이 갸륵했다. 게다가 연주곡 없이 오롯한 열두 곡을 욱여넣은 정규 앨범은 흔치 않으니 앨범 단위로 듣는 내게는 호기심이 일기에 충분했다. 그 노래들을 대부분 직접 만들었다는 크레딧을 보고 뮤지션으로서의 면모에 혹하기도 했다. 음악이란 대부분 집에 있는 로잉머신을 탈 때 듣게 된다. 그날의 운동은 그날 듣는 음악에 좌지우지되기도 하니 선뜻 손이 가지는 않았지만 궁금증이 거부감을 이겼다. 결국 며칠 뒤, 홀로 집에서 로잉머신에 앉아 멜론 앱을 켜고 해당 앨범을 재생시켰다.
 첫 곡부터 예상과 다른 사운드에 귀가 끌렸다. 빵빵한 오케스트라에 락 사운드를 접목시킨 ‘담’이라는 노래의 메시지가 예사롭지 않았다. 트로트에 대한 리스너의 편견을 넘어서리라는 선전포고였다. 심지어 이 곡 마지막 애드리브의 진행은 RnB의 그것이었다. ‘Second chance’는 어쿠스틱 사운드에 인디에서 들을 법한 멜로디가 돋보였고, ‘찬찬히’는 왈츠 리듬에 창법이 트로트 답지 않게 사뿐사뿐했다. 마지막 트랙인 ‘안녕 김명’은 베이스, 드럼, 피아노로 구성된 재즈 트리오에 여행지의 추억을 그리는 가사가 트로트 앨범이라는 낯선 여행의 마침표를 찍기에 어울렸다. 이렇게 다양성을 가진 중간중간에 놓인 정통 트로트인 ‘한량가’나 ‘갈색 우산’, 코믹한 가사에 웃음이 터지는 ‘머선 129’ 같은 곡들을 들을 때에도 오롯이 즐길 수 있었다.
 이 앨범을 한 마디로 소개하자면 입기에 편한 캐주얼 맞춤 정장이다. 'Manners Maketh Man.' 타이틀인 신사답게의 한 가사이기도 하다. 이 문구의 첫 자를 따서 앨범의 이름을 MMM으로 만들었고 다시금 그 의미를 Music Makes Me라고 지었다고 한다. 편하지만 쉽지 않은 남자라는 신사답게의 한 가사가 영탁이라는 뮤지션을 가장 잘 말해준다. 작년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불편한 편의점의 김호연 작가는 쉬운 작품일수록 쓰기에 쉽지 않다고 했다. 트로트라는 경계 안에서 다양한 장르를 편하게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내는 과정 역시 쉽지 않았으리라. 가수 생활 17년 만의 첫 정규앨범을 훌륭하게 완성해낸 이들에게 있는 힘껏 박수를 쳐주고 싶은 마음이다.
 음원 사이트에서 추천곡을 틀면 내가 즐겨듣던 곡들을 기조로 플레이리스트를 제공한다. 그놈의 알고리즘으로 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제공하는 만큼 새로운 취향을 찾아가기에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유튜브 영상도, 네이버 광고도, 인터넷 뉴스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굳이 새로운 것을 찾아보는 노력은 내가 직접 할 수밖에 없다. 좋아하는 뮤지션 위주의 플레이리스트에 트로트 앨범으로 나의 알고리즘을 씻어보자. 누군가를 사랑할 기회를 빼앗는 것이 바로 편견이라고 한다. 그 편견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깨야 할 의무는 내게 있다. 이미 나의 취향과 맞는 무언가만 평생 접하기에도 인생은 부족하겠지만 그렇다고 세상을 좁게 살고 싶지도 않다. 버팀목은 여럿일수록 든든한 법이다.
 그런 고로 래디컬 페미니즘 팟캐스트를 틀어본다. 남성을 배제하는 사상을 가진 분들이 임윤찬이라는 한국 남성의 피아노 콘체르토에 얼마나 감명받았는지 고백한다. 영상을 보는 것부터, 이를 간증하는 것 역시 그분들에게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편견을 깨기 위해서는 '굳이'가 필요하다. 굳이 이 글을 쓴 의도가 바로 편견을 깨기 위함이라면 누군가를 사랑하기 쉬운 방향으로 나의 마음이 정리되기를 바란다. 한두 가지만 맞지 않아도 즐기기 어려운 것보다는 한두 가지만 맞아도 즐길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나이가 들어서 트로트가 들리는 거라고? 그렇다면 오늘 운동은 비비의 1집 'Lowlife princess'와 함께다.

작가의 이전글 그 자체로 즐거운 추론이라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