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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식성 경청꾼 Mar 03. 2023

살아야 하는 아이들

<죽이고 싶은 아이(이꽃님)를 읽고 >

 책이 있으라! 이 작품은 진실과 믿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눈을 감으면 세상에서 빛이 사라진다. 거짓말 같은가? 볼 수 있는 세상에 빛이 없는데 어찌 빛을 논하랴? 다만 눈을 감아도 책은 읽을 수 있다. 이마저 믿기에 어려울까? 태초에 천지창조가 있고 ‘빛이 있으라.’라는 말씀으로 빛이 생겼듯 한 가지 확언할 수 있는 진실은 빛보다 앞서 이야기가 있었다.
 빛이 있기 때문에 어둠이 있다는 말은 진리를 넘어 질리도록 많이 들어왔다. 이렇듯 책, 즉 이야기가 있는 자리에 청자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자신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드러난다. 여고생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본 작품을 읽다 보면 마음에 피멍이 들어 죽어가는 또 다른 소녀와 마주하게 된다. 그들의 죽음에 애도하지 않는 냉혹함에 치를 떨며 열을 내다보면 한때는 독자 자신의 시선이었을 폭력을 발견할지 모른다는 말이다. 이 글이 그 아이들의 뒤늦은 장례이자 최근 더욱 귀한 세상 아이들의 장래를 위한 당위가 되기를 빈다.

 책의 줄거리는 고등학교 1학년 학생 박서은이 벽돌에 맞아 숨지자 그의 친구인 지주연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되고 여러 인물들의 시각으로 해당 사건을 바라보며 그 전말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두 아이의 고등학교 친구, 중학교 동창, 피해자의 남자친구 등 사건을 다루는 시사다큐 프로그램의 인터뷰와, 용의자인 주연을 비롯한 로펌의 변호사, 피해자의 어머니 등 3인칭 시점을 번갈아 사용하는 서술 방식은 벽돌이 높은 곳에서 아래로 떨어지듯 이야기의 흡입력에 가속도가 붙도록 만든다. 더불어 현실에서 사용할 만한 입말을 적재적소에 넣는 등 유려한 문장들로 독자에게 치명적 후유증을 남긴다. 이야기 전후에 두 번이나 ‘해당 이야기는 픽션’이라고 일러두었던 작가의 말도 무용지물이다.
 언론에서 다루는 사건이 이를 어떤 시선으로 비추고 있는지 조명 반대편을 관찰하는 일은 기본이오, 심지어 편의점 등에서 스쳐 지나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렇다고 이러한 후유증에 부작용만 있는 것은 아니다. 범죄가 발생하면 피해자나 가해자는 소수지만 제3자는 넘쳐흐른다. 피해자인 서은은 작품 속에서 누군가의 눈에 비친 모습만 등장하되 살인자의 고해성사는 소설의 끝에 등장한다. 수없이 많은 제3자의 눈으로 사건을 진행하는 서술방식이 작가의 의도에 대한 위와 같은 해석을 방증한다. 범죄 발생 자체의 예방이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토록 절대 다수인 범죄의 제3자에 의한 사회적 비용이 막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범죄를 예방하는 해결 방안이 바로 이 작품의 부작용이기도 한 아이들에 대한 적극적인 궁금증이리라. 주연의 상황을 반면교사 삼아보자.
 서은이 죽기 전까지 주연은 늘 관심에 목말라 외로워했고, 서은이 죽고 난 뒤 주연은 홀로 믿음을 필요로 했다. 외로운 아이의 보호자로는 전형적인 주연의 부모는 사건이 발생하고 각자의 인생을 가장 걱정한다. 이해는 된다. 위협이 닥치면 조건반사로 몸을 웅크리듯 그들 역시 자신이 가장 중요하리라. 다만 작품에서 주연의 부모 시점이 서로 멀리 떨어져 등장하며, 그 때에 서로에 대한 언급이 없다시피 한 면에 주목해보자. 이들 가족 사이의 심적 거리를 알 수 있다.
 엄지발가락을 접어야 신을 수 있는 240 사이즈의 신발 탓에 발톱에 피멍이 들었을 주연이 그 신발이 약간은 컸을 서은에게 주었고, 후에 그 신발로 공치사를 하는 장면이 주연의 공허를 잘 보여준다. 주연의 어머니가 딸이 어떤 옷을 좋아하는지 같은 사소한 질문이라도 했더라면, 주연의 아버지가 한 번이라도 자신의 딸을 보기 위해 면회를 갔더라면 주연의 오해가 집착으로, 다시 절망으로 번지지는 않았으리라.
 악은 무지에서 나온다. 알지 못함은 너무도 쉽다. 지식 습득 자체의 노고를 뜻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소년범죄가 언론에 나올 때 ‘저런 애들은 죽어도 싸.’라는 말에 시큰둥하다면 피해자의 눈물에 공감하지 못하는, 어쩌면 가해자를 두둔하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작품 속에서는 ‘가난하면 애를 낳지 말지’라는 서은의 어머니에게의 비난을 한때는 사소한 일에도 사무치게 행복했던 한 가족의 전부를 무시하는 말이었다고 표현한다. 질문 없는 판단은 그 삶과 멀리 있다.
  중증 시각장애인으로서 사회생활을 할 때에 들었던 ‘친척 중에 시각장애인이 있다면 가족력이 있는 거니까 너는 아이를 낳으면 안 되겠다.’라는 문장은 기억 한 귀퉁이에 묻는다. 생각보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많다. 우생학은 부끄러운 과거일 뿐일까?
 “가난은 선이고 부는 악입니까? 죽은 사람은 선이고 살아있는 사람은 악입니까? 그렇다면 여기 있는 우리 모두 다 악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있지 않습니까.”
 소설 속에서 가장 인상 깊던 대사였다. 우리는 삶 안에서 선악을 판단한다. 때론 국밥충이라는 단어가 대중화되어 밥집 이름으로 등장하듯 누군가는 호불호의 영역마저 선악으로 구분 짓는다. 허나 모름지기 선(善)이 확실한 사람만큼 선(線)을 넘기 쉬운 사람은 없다. 삶은 늘 잊어지고 변해가는 만큼 선악의 기준선이 우리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아이들에게 대답할 기회를 주는 것, 질문의 기회를 빼앗지 않는 것이 어떨까?

 작년에 <소년심판>이라는 넷플릭스 한국 드라마를 본 기억이 난다. 해당 드라마는 뉴스로만 접하던 '소년범'을 단지 단어가 아닌 사람으로 볼 수 있는 시선을 시청자에게 선물한다는 면에서 본 작품과 닮았다. 드라마 주인공인 심은석이 말했듯,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에서 ‘온 마을이 무심하면 한 아이를 망칠 수 있다’로 생각을 전환해보자. 아이들이 살아가기 위해 윗세대의 관심이 얼마나 중요한가.
 짙은 어둠일수록 빛을 발하듯 자신의 감정이든 타인의 입장이든 외면의 차가움을 보여주는 본 작품을 읽으며  이들을 가까이 둘 때의 따스함을 실감해보라. 세상에 빛이 사라진 뒤에 필자는 여전히 읽고 싶은 책을 읽고 글로 남기며 새로운 세대를 맞이할 준비를 한다. 아직 어린 조카가 안경을 맞추었다는 소식에 슬퍼하거나 죄책감을 가지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시각장애는 결코 악도, 연민의 대상도, 그 누군가가 내린 처벌도 아니다. 관심을 두는 삶은 늘 축복이기 때문이다. 신의 은총이 모든 아이들에게 내리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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