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에 기대어 독립적인 봄
<'옥상달빛, 소란을 만나다'를 관람하고>
완연한 봄이다. 글을 쓰는 오늘의 최고 기온은 20도에 육박한다니 이 정도면 5월이라고 해도 믿겠다. 갑자기 따스해진 만큼 감기에 걸리기도 쉽겠지만 목이 간질간질하고 마음이 달 뜨는 일까지 어쩔 수는 없다. 사실 꼭 날씨 탓만은 아니다. 땅속에 웅크리던 씨앗처럼 몸을 내뻗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것은 지난달 말에 관람했던 공연과 다음 달에 갈 페스티벌 탓이다.
방역이 한결 느슨해지자 공연 소식이 자주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는 작은 소도시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춥던 겨울, 오전의 문자에 점심을 먹은 뒤 한 시간 정도는 업무에 집중할 수 없었다. 가입해두었던 지역의 공연장에서 좋아할 만한 공연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옥상달빛과 소란, 평소 즐겨 듣던 이들이 이 시골까지 내려온다고? 당일 두 시에 티켓팅을 한다는 소식에 몇 년간 쓰지 않았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찾아두어야만 했다.
하지만 음성지원만으로는 비장애인들과 피 튀기는 티케팅이라고까지 이름짓는 피케팅에서 이기는 어려웠다. 두시에 예매가 시작되고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빈 좌석이 없었다. 티켓 파워가 이렇게 강한 밴드들이었던가? 몇몇 대학교에서는 장애학생들을 위해 수강신청을 미리 열어주기도 한다던데... 코레일은 장애인들에게 명절 예매를 하루 일찍 열어준다던데... 사실 해줘서 고마운 일과해줘야 당연한 일은 다르다. 그 기준이야 각자 다르겠지만 사실 그 무엇도 당연한 건 없으리라. 체념한 나는 다시금 업무에 집중했지만 못내 아쉬움이 남았다. 그 주 일요일 새벽에 한 번 더 좌석을 확인했다. 다행히 생각보다 취소표가 있었다. 나는 일행을 구할 겨를도 없이 두 자리를 예매했다.
두 뮤지션 모두 코로나가 세상을 뒤엎기 전, 중증 시각장애인이 되기 전에 공연을 갔던 기억이 있다. 혼공이었다. 소도시의 직장인의 소확행이라면 가끔 홀로 서울에 올라가 근처 맛집에서 혼밥을 하고 공연을 한 편 본 뒤늦은 밤에 사우나에 들어 땀을 빼고 홀로 누워 누군가 틀어놓은 케이블 TV 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새벽에 내가 사는 지방으로 돌아와 집에 누우면 작은 여행이 완성되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혼자 다니는 일은 불가능하다. 고민하다가 근무지는 멀어졌지만 거주지는 가까운 직장 동료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흔쾌히 요청을 수락했다. 2월의 마지막 주 일요일, 하얀 기모 후리스가 어울리는 날이었다.
햇볕은 따스했지만 공기는 차가우니 봄이 코긑에 닿는 느낌이다. 첫 번째 공연은 옥상달빛이라는 여성 듀오, 잔잔한 호숫가를 거니는 산책 같은 공연에 중간중간 오랜 라디오 디제이라는 경력을 살린 특유의 만담에 입꼬리가 들뜬다. 모든 곡은 '이대로 너는 괜찮아.'라는 주제를 가지고 있어 교회에 다니는 누나들이 화음으로 포근히 안아주는 기분까지 들었다. 역시 위로의 아이콘인 만큼 마지막 앵콜곡도 대표곡인 '수고했어, 오늘도.'다. 두 번째 공연은 소란이라는 4인조 남성 밴드, 첫 곡부터 관객들이 소리 질러주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던 밴드의 보컬인 고영배의 입담은 역시 라디오 계의 유재석이랄 만하다.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시작한 공연은 코러스와 듀엣을 하며 관객 참여형 공연의 진가를 선보인다. 종극에는 관객들도 전혀 몰랐던 노래에 '앗, 이 노래는...!'이라는 연기와 함께 핸드폰 플래시를 흔들며 떼창을 부르기도 하며, 단체로 춤까지 맞춰 추는 지경에 오른다. 부흥회가 따로 없다. 물론 좋은 의미다.
네시 반 즈음 공연장에 들어갔을 때보다 해가 진 7시 반에 공연장에서 나설 때 몸이 더 후끈했다. 돈가스 집에서 그릇의 바닥을 긁고 나니 포만감과 함께 목이 말랐다. 이미 충분히 즐거웠지만 이 공연이 마중물 한모금이 되는 순간이었다. 오히려 봇물 터지듯 인디에 대한 갈증이 올랐다. 직장 동요와 헤어지고 나서 지인 중 음악에 가장 조예가 깊은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인디 음악 스무 개 정도를 추천받고 5월에 있을 인디 페스티벌에 간다는 그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다. 농담 삼아 따라가면 안 되겠냐고 물었더니 어머님과 함께란다.시간 되면 한 번 보자는 인사로 친구와의 연락의 갈무리를 짓자 좋은 음악을 추천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웠다.
다만 페스티벌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듯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오랜만에 연락이 온 또 다른 지인이 마침 공유해준 인디 음악으로 그 기적은 시작되었다. 나 역시 얼마 전 친구에게 추천받은 노래를 답가 삼아 보내드렸더니 음악이 퍽 맘에 드셨는지 그 뮤지션이 참가하는 인디 페스티벌을 예매했다고 한다. 나는 다시 한번 염치없는 부탁을 해보았다. 그 페스티벌에 같이 가주실 수 있겠느냐고. 수락하는 답장을 받으니 혼자 있는 집 안에서 나도 모를 외마디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살아가는 이가 어디 있겠냐마는 사실 혼자 다니는 것을 좋아했던 이유는 남에게 기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탓이다. 이제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결코 혼자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보니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만 하는 일도 주기만 하는 사랑의 억울함에 못지 않았다. 인디 음악이라고 할 때 '인디'란 Independent, 즉 독립적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자본으로부터 독립되어 뮤지션이 만들고 싶어 발표한 음악은 모두 인디인 것이다. 덕분에 다양해진 음악은 점점 남에게 의지하는 것에 무뎌가는 장애인이 되어서도 예전 그대로 좋았다.
끝내 지켜낸 이 취향은 오롯이 나의 것이다. 겉으로나마 다양성을 배제하지 않는 사회는 나같은 사람이 아등바등 살아가는 것을 배제하려 들지 않는다. 함께 공연을 가주었던 직장 동료, 인디 음악을 추천해 주었던 친구, 흔쾌히 페스티벌을 함께 가준다고 대답하는 지인 덕에 겨우내 얼었던 간지러운 싹이 튼다. 씁쓸해하기만 하기에는 마스크를 벗은 이 봄에 사방이 향기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