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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식성 경청꾼 Mar 17. 2023

지푸라기로 외양간 고치기

<2022년 시각장애인 정책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고>

 지난 해 8월 말 즈음, 비장애인 지인에게서 안부 연락을 받았다. 전화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걱정스러움이 잔뜩 묻어났다. 홀로 살던 시각장애인이 화마에 대피하지 못하고 사망했다는 기사에서 내 얼굴을 떠올렸을 그의 우려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실명한 눈으로 생활한지 햇수로 4년, 자취를 시작하면서 다시 사회생활에 뛰어든 지 어언 1년이다. 나는 스스로 충분히 안전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해왔지만 그렇게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인과 통화를 하던 중 창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금세 '어디에서 불이 났나?'에서 '내가 사는 아파트라면...?'으로 생각의 불씨가 빠르게 번져갔다. 한번 불붙은 안 좋은 생각은 쉬이 꺼지지 않았다. 이윽고 속을 그을었던 건 그달 초에 수해 탓에 반지하에 갇혔던 발달장애인 가족과, 봄의 아들이 산불을 내자 대피하다 숨진 80대 노모의 사연이었다. '장애인이나 고령자 같은 사회적 취약계층은 비상 상황에 더욱 취약한 것인가?


 다음 날 인터넷을 찾아보며 119 안심콜 서비스를 등록했다. 컴퓨터 이용에 비교적 익숙했음에도 등록에 애를 먹었다. 여기에서 119 안심콜 서비스란 119에 위난상황을 신고했을 때 신고자의 정보를 미리 등록해두는 서비스이다. 구급 대원이 그의 특성을 미리 알 수 있도록 하여 맞춤형으로 응급처치 및 병원 이송을 하여주는 것이다. 근처의 시각 장애인 동료들에게 해당 서비스에 대해 물어보니 등록했다는 사람은 손에 꼽았다. 집 근처의 비상대피소도 찾아보았지만 홀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제야 나 역시 지금껏 운 좋게 하루하루를 살아남아 왔음을 실감했다.


 그래서 시각장애인 정책공모전 개최 소식을 접했을 때에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물론 공모전에 낼 정책을 수립하는 일은 익숙지 않았다. 법안이나 자료를 찾아보고 머릿속에 있는 정책을 글로 풀어내는 경험이 새삼스러웠다. 국립국어원에서 발표했던 '알기 쉬운 정책명'을 참고하기도 했다. 때로는 이러한 노력이 고장 난 컴퓨터 수리를 직접 해보겠다며 부리는 객기가 아닐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마침내 '안전한 황금시각'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장의 보고서를 완성하자 직접 고친 컴퓨터가 작동하는 기적이 일어났을 때의 희열이 느껴졌다.


 들녘에 벼가 익어가기 좋은 가을의 햇볕이 청명했다. 나는 안부전화를 했던 지인에게 당신 덕에 생애 처음 지시도 받지 않은 정책을 완성했노라며 감사를 전했다. 대화는 가을 오후의 산책처럼 정처 없이 흘러가다가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라는 속담에 다다랐다. 어떠한 사고나 사건이 발생한 뒤에 원인 규명이나 대책 마련을 할 때 왕왕 나오는 말이었다. 지인은 평소 가지던 그 속담에 대한 생각에 대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쉬움에 그런 말을 하는 건 나도 알아. 근데 우리는 소가 아니라 주인이잖아. 계속 살아가야 한다면 외양간을 고쳐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은 모두 똑같지만 어떤 지푸라기를 쥘 건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손원평의 튜브라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명언이다. 나 역시 작은 불씨에도 불타버릴 수 있을 지푸라기와 같다. 사실 모든 이들이 그렇다. 그리고 우리는 살기 위해 서로에게 의지하며 이 사회를 단단히 쥐고 살아간다. 하여 내가 만든 정책이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는 사실보다 나와 같은 시각장애인들이 더욱 안전해지리라는 희망이 나를 기쁘게 했다.


 다른 이에게 맡겨두기만 해서는 당사자의 상처가 제대로 치료되지 않는다. 벽에 이마가 부딪쳐 피가 난다면 직접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자신의 상처를 보여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 곳이나 세워져있는 전동 킥보드나 인도 위의 안내 표지판 등과 관련한 다른 수상자분들의 정책 역시 정강이의 딱지에서 돋아나는 새 살과 같다. 수많은 지푸라기들이 엮여서 동아줄이 되듯 우리가 직접 만든 정책들이 모여 누군가를 구할 날이 오기를 바란다.


 세상 어떠한 억울한 죽음도 그냥 잊히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슬픔을 준 참사를 수습하려는 노력, 그와 같은 이유로 누군가를 잃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애쓰는 노력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한 가장 아름다운 추모의 방법이다.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담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인 외양간을 고치는 또 다른 의미는 없을까? 대답은 미래세대에게 양보해도 좋다. 사회적 약자들이 목소리를 내어 사회를 개선하는 것 자체도 침묵해야 했던 과거보다 진일보한 일일 테니까. 그들의 발언 기회가 지금의 그것보다 늘어나있을 훗날에 내리는 평가는 언제든 늦지 않다.


 우리가 지푸라기라도 쥐는 간절한 심정으로 엮어가고 있는 단단한 동아줄이 항상 서로의 가까이에 있기를 바란다. 이것이 우리가 외양간을 고쳐야 하는 이유이자, 이를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하는 이유이다. 내가 쥔 지푸라기로 외양간을 고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남기며 이만 글을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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