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고양이라서 괜찮아를 보고>
낮에 폭염주의보가 내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은 밤바람이 땀을 말려주었다. 굳이 조금 더 걷도록 냇가 위의 흔들 다리를 건너는 기분이 상쾌했다. 우리는 연극을 보는 동안 마실 음료를 고르기로 했다. 음료를 기다리는 동안 아이가 밤바람처럼 치대 왔다.
“저 아이스크림 엄청 맛있어요.”
무얼 가리키는지도 모른 채 지갑 속에서 카드를 꺼냈다. 아이의 엄마가 선물할 경험을 티끌이나마 갚을 수 있을까? 남몰래 카드를 건네는 나의 유혹을 뿌리친 아이는 ‘엄마! 나 삼촌이 준 카드로 아이스크림 사 먹어도 돼?’라는 정직함으로 허락을 받아냈다. 동생의 손을 붙잡고 아이스크림을 향해 후다닥 내달리는 기특함을 이야기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조카들은 터키 아저씨에게서 득의양양하게 아이스크림을 들고 돌아왔다. 실랑이가 길었는지 카드를 내미는 반대편 손에 녹기 시작한 아이스크림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실컷 먹었다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남은 아이스크림을 나의 입에 가져다 대어 주었다.
“많이 먹어 주세요. “”
진정 그렇게 말했던가? 나는 그리 들었다. 빈말을 모르는 나는 어금니가 보이도록 입을 열었다. 첫째는 딸기, 둘째는 초콜릿이었다. 덥석 문 아이스크림의 반은 줄었으리라. 입안 가득 퍼지는 쫄깃한 딸기와 초코 아이스크림의 향연에 관자놀이가 아찔했다. 머리 띵한 황홀경에 취해 가족들의 안내 보행을 받으며 걸었다. 목적지는 계곡물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극장이다. 객석의 첫째 줄에 매형이 자리를 맡고 계셨다. 연극을 구경한 지는 또 언제던가? 두 조카들을 나의 양 허벅지 가까이 앉도록 하여 둘 모두에게 바람이 갈 정도로 부채질을 해주었다. 풀벌레 소리는 사방에서 들려왔지만 신기하게도 파리 한 마리 나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반면 연극은 창밖을 무료하게 바라보다 파리를 잡는 한 남자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남자의 이름은 ‘고영민’, 연극은 여자친구와의 행복한 일상에 찾아온 고양이가 매력적인 여자로 변신하면서 겪는 영민의 혼란을 그리고 있다. 시작 때부터 영민을 훔쳐보는 시선의 주인공이 읊는 독백으로 끝나는 이 연극의 연령 제한이 몇 세인지는 모른다. 몇 번을 들어도 머릿 제목을 헷갈려 했던 내가 무엇을 알겠냐마는 이따금 초등생인 조카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아이들에게는 부적절하지 않을까 싶은 장면들이 있었다. 하지만 도도라는 고양이가 영민과 작별하는 장면에서 둘째 조카가 나의 품에 안기며 흘리던 눈물은 나의 우려가 기우였음을 방증했다. 보지 않고 즐기던 연극이었기에 이러한 감상 자체가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거창에 처음 방문했다. 마침 국제 연극제 기간이었다. 어떤 연극을 볼지는 누나가 선택했다. 내가 사는 소도시보다 작은 지역에 기대하기 힘든 즐거움이 있었다. 아이의 양육 방향과 시각장애인 동생의 문화생활 중 누나의 선택은 후자였다. 이 모두 역시 착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나조차 내게 착각하기도 한다. 긍정적인 쪽으로 받아들이는 세상 속에 빠져 있는 동안은 행복한 법이다. 착각이 깨지는 순간 기대하지 않던 삶의 재미도 배가되니 배신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착각 덕에 아이스크림을 입안 가득 물었고, 재밌는 연극을 보았으며 고양이의 매력을 굳혔다고 생각해 보자. 연인끼리 보면 좋을 이 연극을 가족들과 함께 보며 얻은 교훈이다. 착각 속에 살아도, 그 착각이 깨져도 당신의 우주는 괜찮다.
어린 시절에는 고양이를 무서워했다. 어둠 속에서 형형히 빛나던 안광에 깜짝 놀랐던 기억 탓에 고양이 하면 두려울 뿐이었다. 다시는 그 눈빛을 볼 수 없음에도 이러한 반감은 극심했다. 야밤에 들리는 기괴한 짝짓기 소리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매체에서 등장하는 고양이 역시 귀여움보다는 마녀라든가 원혼에 관심이 쏠렸다. 이토 준지라는 공포 만화가가 그린 고양이 일기의 몇몇 짤도 여전히 뇌리에 남아있다. 그러한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녹여준 작가가 바로 베르나르 베르베르다. 고양이, 문명, 행성으로 이어지는 3부작에 등장하는 암고양이의 이야기와 고양이 백과사전을 읽으면서 편견이 깨져갔다.
마녀와 어울리는 고양이의 이미지에는 미안함까지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페스트가 유행하던 중세 말에 픽픽 쓰러져가던 신자들과는 달리 고양이를 키우는 이들이 병에 걸리지 않자 그들을 마녀로 몰았다는 것이다. 단지 고양이는 역병의 매개체인 쥐를 내몰았을 뿐이다. 강아지는 인간의 다섯 살 정도의 지식, 고양이는 50대 정도의 태도라는 말에는 무릎을 쳤다. 왕왕 반려동물로서 비교당하는 강아지와 고양이 중 선택하라면 물어볼 것도 없이 강아지 파였는데 이제는 각각의 매력에 취할 수 있었다. 그 뒤로 접하는 고양이의 몸짓에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행동을 겹치기도 했다. 연예인들은 고양이 상이고 강아지 상이고 모두 예쁠 것이었다.
연극을 보고 나오는 길에 둘째 조카는 자신도 사실 고양이이고 이름은 토토라며 냥냥 거렸다. 내 손등에 가만가만 볼을 부비는 모습에 여지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첫째 조카는 포켓몬이 되어 사방을 뛰어다녔다. 둘째도 오빠를 따라 포켓몬이 되었다. 어린 시절 포켓몬을 열심히 본 보람이 있었다. 알로라 지방의 식스테일이 무슨 타입인지, 롱스톤의 진화형이 무엇인지 기억하는 덕에 한결 조카들의 놀이를 즐겼다.
“삼촌은 뭐 할래?”
“삼촌은... 냐옹이다옹!”
내게는 아이들이 미래에 무엇이 되는지보다 지금 무엇이 되는 상상을 할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 아이들의 내일은 부모에게 맡기기로 하자. 나의 역할은 조카들을 실컷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것도 착각일지 모른다만 고양이에 대한 편견 탓에 지난 삶 동안 놓쳐버린 행복을 아이들에게 겪도록 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질퍽한 착각의 늪 속에 지난날의 편견을 빠뜨렸다. 잠겨가는 고양이에 대한 공포를 뒤로하며 걷는 걸음이 상쾌했다. 늦은 밤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