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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식성 경청꾼 Aug 25. 2023

열정이 식기 전까지 나를 베고 평안히

<아산에서 별빛 음악제(8. 14.)를 즐기고>

 “삼촌, 저 집에 돌아왔어요. 너무 보고 싶어요. 사랑해요.”
 며칠 만에 돌아온 자취방을 정리하던 중 누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영상 속 조카의 울먹임이 나의 입꼬리에 곡선을 그려 주었다. 그날 새벽, 몇 주 만에 유치원을 가야 하는 조카를 토닥이며 깨웠을 때에도 아이는 내 어깨를 벤 채 흐느꼈었다. ‘삼촌 꼭 가야 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겨우 얼려두던 미소가 녹아내려 돋아났다. 그 전날 새벽에는 잠에서 깨 화장실을 다녀온 내 품에 안겨 ‘삼촌 오늘 가는 거 아니지?’라는 잠투정으로 귓가를 간지럽혔었다. 가속이 붙은 아산에서의 추억은 조카의 사랑을 받는 나의 미소처럼 멈출 줄 모르고 시간을 거꾸로 달렸다.
 음악 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 찾은 아산이었다. 신정호라는 호수 근처 공원에서 별빛음악제를 개최했다. 다음 날 집에서 뒹굴뒹굴하기만 할 예정이었기에 모든 공연을 실컷 즐기기로 했다. 우리의 목적은 마지막 순서인 임태경이었다. 중장년 여성분들의 아이돌인 만큼 어머니께서도 좋아하시는 가수였다. 뮤지컬 넘버부터 클래식, 성인가요와 올드팝까지 아우르는 신사다운 무대매너에 어머니 역시 소녀처럼 관객의 함성을 더했다. 가장 신났던 넘버는 How deep is your love. 어깨 위에 조카를 아령 삼아, 라이브로 하는 노래를 노동요 삼아 허벅지 운동을 끝냈다.
 하림의 공연 동안 채웠던 칼로리가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밖에서 돗자리를 깔고 먹는 저녁은 맛이 곱절로 느껴지는 만큼 허기짐은 갑절로 빨랐다. 공연 콘셉트는 아프리카 여행이었다. 간식 없는 여행이 무슨 맛이겠는가? 매형과 조카가 주전부리를 사 온다는 이야기에 얼마 전에 받은 편의점 상품권 기프티콘을 공유했다. 월드콘과 바나나킥은 주전부리계의 근본이었다. 잘 먹는 것으로 유명한 개그맨의 명언처럼 아는 맛이 제일 무서운 법이다. 한동안 과자를 고를 때 바나나킥만 골랐던 적도 있었다. 그러다 문득 여행이라는 새로운 경험을 익숙한 취미로 삼는 하림 같은 사람들이 궁금해졌다. 씹어 먹어도, 혀로 녹여 먹어도 최고인 이 식감에 어울리는 달콤함 때문에 이 과자를 끊지 못했었는데 늘 새로운 경험을 찾아다니는 여행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하지만 나는 가족과 함께 하는 익숙한 맛이 좋다.
 저녁을 푸드트럭에서 골라 담았다. 바깥바람을 맞으며 먹는 감자전과 김치전은 어머니를 찾게 되는 맛이었다. 오래도록 집에 있을 때 내가 김치를 지겨워할 때마다 우유를 넣고 해 주셨던 어머니 표 김치전은 나의 입맛을 돌게 하는 치트키였다. 추억에 빠진 뇌와는 관계없이 입은 끊임없이 닭꼬치와 떡볶이를 씹어댔다. 한윤미 밴드라는 낯선 이름과는 달리 익숙한 음악 탓이다. 로스트 아크라는 게임은 수준급의 배경 음악으로도 유명했다. 가끔 단순 업무가 필요할 때 게임 OST를 틀어놓고 자판을 두드리면 마치 내가 지금 게임을 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러한 습관 덕에 내게는 익숙했던 음악에 고개를 까딱거리는데 막내 조카가 처음 들을 음악에 춤을 추기 시작했다. 파닥거리는 몸짓에 온 가족은 15개월짜리 아이가 댄스스타라도 되는 듯 박수갈채를 보냈다. 박수를 치며 음식을 입에 넣는 단순 반복을 끝내고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을 시간, 어느덧 그 순서의 끝이 보였다.
 “마지막 노래는 뭐일 것 같으세요?”
 “Legend never die!!!”
 젊은 남성의 목소리가 하늘을 울리는 듯 쩌렁쩌렁했다. 10년 넘게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게임의 주제곡이었다. 처음 듣는 음악이었지만 압도적인 스케일에 소름이나마 기립했다. 노래가 끝나고 리그 오브 레전드 게임의 프로 게이머와 밴드의 리더인 한윤미 사이의 인터뷰가 잠시 진행되었다. 내게 E스포츠란 스타크래프트의 택뱅리쌍이라 불리는 시대가 마지막이었다. 전혀 모르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음은 자신 있게 마지막 곡을 맞추었던 젊은 남성의 열정적인 리액션 덕분이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그 프로게이머가 롤드컵이라는 세계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더라도 나는 그 소식을 알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그의 선전을 빈다.
 내가 전혀 모르는 세상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많다. 택뱅리쌍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으리라. 열정을 가지고 즐기는 그 무엇이 게임일 수도 있고, 여행일 수도 있으며, 아주 훤칠한 남자 가수일 수도 있다. 다만 그러한 열정은 틀림없이 식기도 한다. 열정을 쏟을 대상이 변하거나, 나의 열정이 식는다. 그럼에도 사랑을 쏟았던 기억은 남아 이따금 나를 데워준다. 이제는 보지 못하는 옛 무한도전을 켜놓고 장면 장면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듯 말이다.
 가족들이 먼저 돗자리를 깔아 자리를 잡고, 저녁을 사는 동안 나와 조카는 차의 조수석을 지키고 있었다. 내 품에서 잠이 든 조카의 낮잠 시간을 지켜주기 위해서였다. 자리를 다 잡았는지 조카를 깨우는 누나의 손에 이끌려 비몽사몽 내게 업힌 조카는 네게 몸을 더욱 깊이 기대 왔다. 가족이 기다리는 돗자리에 앉은 뒤에도 나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던 조카는 아이들이 좋아할 마술쇼 공연에 점점 몸을 일으켰다. 그래, 이렇게 마술 같은 삶으로 멀어질 조카라면 함께하는 동안 실컷 안아주기로 하자.
 잠에 들 때면 내내 내 품에 안겨 숨을 골랐던 조카의 애정이 다른 곳을 향할 때까지 이 아이에게 사랑하기에 좋은 경험을 실컷 선물해 주고 싶었다. 남들은 전혀 모를 나라는 세상에 서슴지 않고 사랑을 고백해 주는 이 아이를 위함이고, 사랑스러운 이 아이에게 사랑을 받는 나를 위함이다. 전혀 다른 두 팝송의 제목처럼 이다지도 깊은 그대의 사랑 덕분에 전설은 결코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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