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또 쓸 일이 있을지도 몰라.(차고정리)

by Ding 맬번니언

오늘은 호주에서 ‘킹스 버스데이(King’s Birthday)’로 지정된 공휴일이다. 영국 국왕의 생일을 기념해 하루를 쉬는 날이지만, 우리 가족에게 오늘은 조금 더 특별한 의미로 남았다. 우리 가족은 오늘 무언가를 비우고 정리하는 날이 되었다. 말하자면, 물건을 비우는 척하면서 사실은 우리 안의 오래된 감정들을 하나씩 내려놓는 그런 날 말이다. 공휴일이지만 월요일 나는 일을 하고 퇴근길에 한국 슈퍼에 들러 삼겹살을 샀다. 집으로 돌아오니 행복이가 반겨줬고, 우리는 삼겹살을 구워 점심을 먹었다.

내가 출근해서 일하는 동안 스티븐은 오늘도 부모님을 도우러 실버타운으로 향했다. 아직도 이삿짐 정리를 끝내시지 못해서 점심도 거르고 부모님 일을 도와주고 있는 스티븐이다. 그렇게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서는 곧장 차고 정리에 나섰다. 우리가 차고 정리를 하는 이유는 새로운 기아 자동차를 차고에 들이기 위해서다. 그래서 지금까지 쌓아두었던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내 보기 시작했다. 그 속에는 오래전에 쓰다 만 캠핑 의자, 여행 가방, 낡은 책들, 그리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전선 뭉치들이 있었다.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손에 들고 나면 망설이게 되는 것들.


'혹시 또 쓸 일이 있을지도 몰라.'
'이건 예전에 소피아랑 썼던 거였지.'
스티븐이 추억에 잠긴 듯 이야기를 했다. 그때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감정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이미 다 지나간 감정인데도 우리는 여전히 어딘가에 고이 쌓아두고, 때때로 꺼내어 보고, 혹시나 다시 쓸 일이 있을까 두려워 못 버리는 감정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늘 무거워진다.

물건은 차고를 채우고, 감정은 마음을 채운다. 어느새 숨통이 트이지 않는 공간, 내 안의 차고가 꽉 차 있는 걸 오늘에서야 느꼈다. 스티븐은 그 순간, 그의 아이들에게 연락을 했다.

"이제 너희 물건들 좀 정리하자."
소피아가 먼저 집에 왔고, 그녀는 상자 속 물건을 하나하나 꺼내보았다.
그러다 사진첩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이건 보관할 거죠?”
우리는 말했다.
“지금 우리, 필요 없는 것들은 다 비우는 중이야. 필요하면 가져가고 아니면 버린다” 스티븐이 말했다.


조슈아도 뒤따라 왔고, 그는 자신의 물건들을 둘러보더니 필요한 것만 챙기고 나머지는 과감히 놓고 갔다. 남자와 여자가 물건에 대한 감정을 들어다 보는 것이 조금 달랐다. 그렇게 차고 한편이 조금씩 비워졌다. 무언가를 버린다는 건, 단지 물건 하나를 치우는 일이 아니다. 그 안에 담긴 이야기, 추억, 그리고 때로는 미련을 놓는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나라는 사람의 서랍을 다시 열어보는 일. 나는 오늘 차고를 정리하며 내 안에도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비워야 한다는 마음과, 놓지 못하는 마음이 팽팽히 맞서 있다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 사실 나는 여전히 비우는 것이 서툴다. 그래서 이렇게 하루를 쓰며 연습한다. 내 안의 오래된 감정들도, 언젠가는 차고처럼 환하게 비워지기를 바라며.

그리고 발견했다. 예전에 행복이 생일파티 때, 친구들을 초대하며 준비했던 감사 선물용 장난감.
한꺼번에 다량으로 구입했던 그것들이, 아직도 차고 한 구석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미 몇 해가 지났고, 아이들은 그 사이 한 뼘 더 자랐다. 10살이 넘은 그들에게는 장난감은 더 이상 그들의 관심 밖이다. 그럼에도 나는 장난감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왜일까.
그건 단지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내가 그 시절 행복을 위해 준비한 수고, 친구들이 웃으며 선물을 받아가던 장면, 그리고 ‘아빠로서 잘하고 싶다’는 내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결국 그 장난감들을 버린다는 건 그 시절의 나를, 그 순간의 감정을, 어느 정도 놓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버리는 건 언제나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우리가 버리지 못하는 건, 물건이 아니라 그 안에 스며든 이야기들이니까.

하지만 오늘은 그 이야기들조차도, 감사히 떠나보내기로 마음먹는다.

더 가벼워지기 위해.
그리고 더 자유로워지기 위해.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사는 맬번니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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