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스티븐 부모님과 함께 점심을 했다. 유럽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일을 시작했고, 치카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여행에서 돌아온 지 사흘 만의 만남이었다. 오랜만에 뵌 두 분은 다행히 건강해 보였고, 우리는 그분들이 좋아하는 바닷가 근처 작은 식당으로 향했다. 창가 자리에 앉으니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짭조름한 바닷바람이 불어오고, 햇살이 테이블 위에 살짝 내려앉았다.
우리는 따뜻한 빵과 해산물 요리를 나누며 여행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스와 프랑스에서 보았던 풍경들, 런던에서 겪은 소소한 해프닝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건강 이야기로 이어졌고, 모두 웃으며 대화를 나눴다.
그런데 한참 이야기가 무르익을 즈음, 스티븐 아버지가 갑자기 이마를 짚으며 “머리가 좀 아프네”라고 하셨다.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표정이 굳어지고, 눈가에 힘이 빠져가는 것이 보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대화하시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 같아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접시에 담긴 음식보다 아버지의 얼굴만 바라보게 되었고, 혹시 또다시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닌지 긴장이 몰려왔다.
내 눈에는 스티븐 아버지의 상태는 겉으로는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대화 도중 불쑥 잊어버리거나 집중력이 흐려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치매의 전조 증상 같았다. 유럽으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몇 편의 영화를 보았는데, 그중에 치매를 다룬 작품들이 있었다. 거기서 묘사된 장면과 스티븐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처음에는 단순한 노화일 거라 애써 넘겼지만, 조사해 보니 내가 느낀 불안이 전혀 근거 없는 게 아니었다.
이 사실을 스티븐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호주의 문화는 한국과는 달랐다.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 결정한다”는 원칙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가족이 걱정하더라도,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강요할 수 없었다. 그 점이 정말 답답했다.
스티븐의 어머니 역시 같은 태도였다. 그녀 역시 기억력이 흐려지고, 분명 알츠하이머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데도 “나는 괜찮다, 알츠하이머가 아니다”라며 단호하게 검사를 거부하고 있었다. 가족의 걱정은 들리지 않는 듯, 본인은 여전히 건강하다며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모습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나는 불안과 답답함 사이에 서 있었다. 눈으로는 분명 보이는데, 정작 본인들은 부정하고, 제도와 문화는 가족의 개입을 제한한다.
이런 개인주의 문화는 솔직히 나에게 낯설고, 때로는 불편하다. 한국에서는 가족이 건강 문제를 발견하면, 본인이 원치 않아도 검진을 받게 하거나 강제로라도 치료를 설득하는 경우가 많다. 가족이 함께 책임지고, 때로는 간섭하면서라도 지켜내려는 문화가 있다. 그것이 때로는 답답하고 과한 통제로 보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함께한다”는 감각은 분명하다.
반면 서양에서는 본인의 문제는 오직 본인이 결정한다. 가족은 걱정할 수 있지만, 강제로 무엇을 시킬 권한은 없다. 결국 아버지와 어머니가 스스로 검사를 거부하면, 그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 나는 그 점이 가장 힘들다. 눈앞에서 분명 이상 신호가 보이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바라봐야 한다는 사실이 견디기 어렵다.
나는 가족이라면 때로는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함께 아프고, 함께 싸워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이 간섭이 되고,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두 문화의 차이는 분명하지만, 막상 사랑하는 가족의 건강이 달린 문제 앞에서는 나는 여전히 한국식 사고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이점이 나를 정말 힘들게 하는 하루였다.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사는 멜번니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