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행복이와 앤디의 슬립오버가 있는 날이다. 이런 날 행복이는 조금 달라진다. 누군가가 곁에 있을 때, 특히 친구가 있을 때, 그는 자신이 가진 ‘힘’을 과시하고 싶어 한다. 그 힘은 어른의 눈으로 보면 우스울 만큼 작고 허술하지만, 아이에게는 분명한 권력이다. 그는 자신의 파워를 친구에게 자랑하고 싶어 한다.
“아빠, 오락실 가고 싶어.”
“루나 파크, 루나 파크”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안다.
그 말들은 늘 갑작스럽고, 맥락이 없으며, 대부분 돈을 써야만 가능한 요구들이다. 그리고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순간, 태도는 걷잡을 수 없이 흐트러진다. 말투는 거칠어지고, 얼굴에는 불만이 그대로 드러난다. 마치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중심이 되지 못하면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친구 앞에서 자신이 집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오늘은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왜냐하면 똑같은 장면을 다른 존재에게서도 보았기 때문이다. 강아지 치카다. 행복이의 말도 안 되는 요구와 태도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 나는 치카가 무엇을 하는지 보지 못했다. 늘 하얗고 깨끗하던 치카가 조용히 사라진 것도 모르고 있었다. 한참 뒤에야 마당을 둘러보다가 치카를 발견했는데 그 순간, 다른 강아지인 줄 알았다.
눈처럼 하얗던 치카는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버벅이 된 털, 까맣게 변한 다리, 얼굴까지 덮인 흙.
마치 다른 존재처럼 보였다. 그 순간 웃음이 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찔렸다. 치카도, 행복이도, 지금 이 순간 관심을 놓치면 바로 엉뚱한 방식으로 존재를 드러내는 존재들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도 그렇고, 강아지도 그렇다. 관심이 충분할 때는 평온하지만, 관심이 잠시만 흐트러지면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나 좀 봐줘”라고 외친다. 말로, 요구로, 행동으로.
치카는 오늘 예정에도 없는 목욕을 해야만 했다.
오늘은 슬립오버라는 작은 이벤트 하나로 집 안의 질서가 흔들렸고, 나는 그 속에서 두 존재를 동시에 놓쳤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나를 조금 멈추게 했다.
아이의 마음을, 강아지의 신호를 ‘문제’로만 처리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치카를 씻기며 다시 하얀 털을 마주했을 때, 행복이에게 “지금은 안 돼”라고 말한 뒤돌아선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권력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 뒤에는 대부분 불안과 확인 욕구가 숨어 있다는 것을.
오늘은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요구와 흙투성이 강아지 덕분에 ‘관심’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된 날이었다. 그리고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오락실 대신 도서관에 갔다. 그리고 깨끗해진 치카와 다 같이 산책을 하고 오늘 하루를 마무리했다.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사는 멜번니언이 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