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어떤 조건에서도 설렘을 동반하는 것 같다. 지금 상황에서 마음 한편에서는 그 감정이 못마땅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상황에서 설레도 되는 걸까, 즐거워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설렘은 마음의 결을 타고 스며든다. 그래서 나는 그 감정을 밀어내는 대신,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솔직히 나는 지극히 평범하고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스티븐은 지난 두 달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아버지를 찾아뵈었다. 병원에 들러 아버지의 상태를 확인하고, 어머니를 도와 이것저것 처리했다.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 시간들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나는 알고 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다스렸다.
그리고 우리가 여행을 떠나기 직전, 다행히도 아버지는 ICU를 벗어나 일반 병동으로 옮겨지셨다. 그 소식 하나에 우리는 숨을 조금 돌릴 수 있었다.
“이제 조금은 괜찮겠지.”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스트레스는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생각하지 않기로, 걱정하지 않기로 여행을 즐기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늘 그렇듯, 인생은 우리가 정한 타이밍을 비껴간다.
말레이시아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에서 스티븐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벨이 울리는 순간, 잊고 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비행기 안에서 잠시 눌러두었던 긴장, 불안, 죄책감 같은 것들이 다시 몸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다행히 위급한 연락은 아니었다. 스티븐 아버지가 병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싶어 하시는데, 그 병원에서는 개인 결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결제는 스티븐이 해야 했다. 그 사소한 요청 하나가, 우리를 다시 현실로 끌어당겼다.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는 안도감과 함께 ‘우리가 여기 있어도 되는 걸까’라는 질문이 동시에 밀려왔다. 하지만 동시에 또 다른 생각도 들었다. 아버지는 지금 살아 계시고, 병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싶어 하실 만큼 일상의 감각을 조금씩 되찾고 계신다는 사실.
우리는 그 사실 하나에 마음을 붙들었다. 여행지의 공기는 덥고 습했지만, 그 전화 한 통 덕분에 오히려 현실이 또렷해졌다. 도망치듯 온 여행이 아니라,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자리를 옮긴 것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다시 확인했다.
설렘과 걱정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기쁨과 불안도, 죄책감과 감사함도 같은 시간 안에 공존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그 사이에 서 있다. 멀리 와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병실 근처에 있고 걱정 속에 있지만, 그래도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하루를 시작하려 한다. 여행은 도피가 아니라, 다시 돌아오기 위한 잠깐의 숨일지도 모른다.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사는 멜번니언이 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