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나의 부모라면 어떤 방식으로 이 고통을 통과할 것

by Ding 맬번니언

많은 분들이 걱정을 해주시지만 나는 이 상황에서 제삼자다. 그래서 한국에 계신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을 차분히 설명했다. 역시나, 엄마는 전형적인 한국 사람이었다.

내 이야기를 듣자마자 기겁을 하셨다.

“아버지가 죽음을 문전에 두고 계시는데 자식들이 환갑 파티를 한다는 게 말이 되니?”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멜버른에 오지 않을 수가 있니?”

엄마의 반응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했다.

한국에서 자식의 도리는 ‘곁에 있는 것’이고, ‘마지막까지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몸이 그 자리에 있지 않다면 마음도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문화 속에서 엄마의 놀람은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내가 엄마에게 전화를 한 것도 어쩌면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을지 모른다. 이 상황을 누군가에게 설명하고 싶었고, 설명하는 과정에서 내 감정의 위치를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스티븐의 형제들도 이해가 되었다. 누군가는 아버지의 죽음을 직접 마주하는 것이 너무 두려울 수 있다. 어떻게 해드리지 못하는 그 무력함과 공포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견디는 일이 각자에게는 감당하기 벅찰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고통을 피해 간다. 누군가는 병실을 찾고, 누군가는 일상을 유지하고, 누군가는 파티라는 이름의 빛 속에 잠시 몸을 숨긴다.


그 선택이 옳고 그르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고통을 견디는 방식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요즘 자주 이런 생각을 한다. 피해도 되는 고통이 있고, 피해서는 안 되는 고통도 있다는 것을.


모든 아픔을 억지로 끌어안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어떤 고통은 외면할수록 더 오래 남는다. 그리고 언젠가, 더 무거운 형태로 돌아온다.


나는 지금 그 경계에 서 있다. 이해하려 애쓰면서도, 외면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위치.

누군가를 판단하지 않되, 스스로에게는 질문을 던지는 자리.


“만약 나의 부모라면 어떤 방식으로 이 고통을 통과할 것인가." 확실한 것은 나는 그들처럼 도망치지 않는 것이다.

완벽하게 감당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고개를 돌리지는 않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아마 그것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장례식을 끝낸 후 휴가를 갈 것 같다. 도망치듯 떠난 휴가가 아니라, 견딜 수 있을 만큼 숨을 고르기 위한 시간으로.

이번 휴가는 나에게 한 가지를 분명히 알려주었다.
사람들이 왜 휴양지를 찾는지,
왜 아픔의 한가운데서도
잠시 떠나야 하는지를.


휴가는 기쁨만을 위한 시간이 아니었다. 슬픔을 잊기 위한 도피도 아니었다. 그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잠시 몸을 눕히는 자리였다.


모든 것을 내려놓지 않아도 되고, 모든 것을 해결하지 않아도 되는 곳.
다만 살아 있는 내가 다시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는 시간.


나는 이 휴가를 통해 삶이 계속된다는 사실을 배운다. 죽음이 너무 가까이 와 있어도, 해는 뜨고, 바다는 흔들리고, 사람은 여전히 숨을 쉰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누군가를 외면하는 일도, 사랑을 포기하는 일도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나도 이제 46이다. 죽음이 남의 일이 아닐 수도 있는 나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이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


이 휴가는 나를 더 가볍게 만들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무너지지 않게 붙잡아 주었다.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사는 멜번니언이 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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