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창피한 일일까, 아닐까.
생각해 보면 많은 어른들이 배우고 싶어 하면서도 나이 때문에 포기한다. 배우는 일은 아이들이나 젊은 사람들의 몫이라는 보이지 않는 규칙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교실에 앉아 있는 어른은 어딘가 어색해 보이고, 서툰 어른은 더 쉽게 눈에 띈다. 우리는 실수하는 아이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도, 실수하는 어른에게는 이상하게 더 엄격하다. 어른들을 배우는 것이 아닌 가르치는 입장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그 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무언가를 새로 시작할 때, 설렘보다 먼저 창피함이 올라온다.
“내가 여기 있어도 되나?”
“너무 늦은 거 아닐까?”
그런 질문들이 마음속에서 먼저 튀어나온다. 이 창피함을 뛰어넘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다.
나는 한 번도 제대로 테니스를 배워본 적이 없다. 라켓을 잡는 법도, 서는 자세도, 기본 동작도 체계적으로 배운 기억이 없다. 만약 어릴 때 조금이라도 배웠다면 덜 창피했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한다. 하지만 현실은 지금이다. 나는 초보다.
그런데 그런 초보인 내가 행복이를 위해 테니스 코트에 갔다.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같이 공을 치기 위해.
그런데 코트에 다른 어른들이 있는 모습을 보고 순간 멈칫했다. 다들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고, 나는 그들 사이에서 가장 서툰 사람이 될 것이 분명했다. 몸이 굳었다. 괜히 라켓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솔직히 창피했다.
내가 너무 못할 것이 뻔해서.
하지만 그 순간 이상하게 선택은 단순했다. 창피함보다 중요한 것이 눈앞에 있었다. 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30분 동안 아이와 공을 쳤다. 폼은 엉망이었고, 실수도 많았고, 공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순간도 많았다. 그런데 행복이는 웃고 있었다. 아이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잘 치는 아버지가 아니라, 같이 뛰어주는 사람이었다.
그 30분 동안 나는 깨달았다. 창피함은 대부분 내 머릿속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생각보다 나에게 관심이 없고, 내 실수는 내가 느끼는 만큼 크게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와 함께 웃는 시간이 창피함보다 훨씬 컸다.
기타도 마찬가지다. 등록은 했지만, 46살에 악기를 배우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 손은 굳어 있고, 소리는 삐걱거리고, 머리는 따라가지 못한다. 교실에 앉아 있으면 내가 가장 늦게 출발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나는 시작했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창피함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창피함을 안고도 계속 가는 법을 배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아이에게 우리는 늘 말한다.
“틀려도 괜찮아.”
“처음이니까 못해도 돼.”
그 말을 이제는 나에게도 해야 할 것 같다. 배운다는 것은 나이가 아니라 용기의 문제다.
그리고 나는 지금, 조금 늦었지만 그 용기를 연습하고 있다.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사는 멜번니언이 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