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마다 다르다고 하지만 행복이는 정말 나와 많이 다르다. 나는 스스로를 돌아보면 조금 섬세하고, 감정에 민감한 편이다. 어쩌면 내가 게이이기에 일반 남성에 비해 더 많이 느끼고, 더 많이 생각하며 살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행복이를 이해하는 일이 가끔은 쉽지 않다. 오늘 행복이는 겨울 스포츠 축구팀에서 떨어졌다. 어제 까지 걱정을 많이 했는데 많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아이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속상할 거라고 생각했고, 조금은 실망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감정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그런데 행복이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축구 거지 같아.”
그 말 한마디였다.
나는 그 말속에 감정이 숨어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말했다.
“축구가 거지 같은 게 아니라, 속상해서 그런 거야.”
“화나도 괜찮고, 슬퍼도 괜찮아. 그렇게 느끼는 게 자연스러운 거야.”
하지만 행복이는 여전히 담담했다.
“괜찮아. 대신 네트볼 하게 됐어.”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또 생각했다. 아이의 감정 표현 방식은 나와 다르다는 것을.
나는 느끼면 그걸 밖으로 꺼내고 싶은 사람이고, 행복이는 느껴도 굳이 표현하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 더 강한 방식일 수도 있고, 아직 표현을 배우지 않은 단계일 수도 있다. 나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생각하지만, 행복이는 “그냥 넘기는 것”이 더 편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나는 친한 사람끼리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경험으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아이의 감정을 정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 한 가지.
나는 아들이 조금 더 부드럽고 자신의 감정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거칠어야만 남자다운 것도 아니고, 참는 것이 강한 것도 아니라고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것 역시 내 기준일 수도 있다. 행복이는 마초스러운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터프하고 슬픈 일에도 울지 않는 나와 전혀 반대되는 성향이다.
그런데 오늘 또 다른 일이 있었다. 행복이가 친구를 괴롭히는 아이와 맞서 싸웠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솔직히 자랑스러웠다. 누군가를 위해 한 발 나섰다는 것.
그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과정에서 행복이도 맞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그래서 네가 태권도를 배우는 거야.”
그 말속에는 여러 감정이 섞여 있었다. 지켜주고 싶은 마음, 강해졌으면 하는 마음, 그리고 조금은 현실적인 부모의 마음.
오늘 하루를 지나며 다시 느꼈다. 마초적인 성향을 가진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아이를 바꾸는 일이 아니라 나의 기준을 계속 점검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행복이를 키우면서 아직도 행복이를 배우고 있다. 그리고 아마 그 과정은 계속될 것이다.
다르기 때문에 힘들지만, 다르기 때문에 더 넓어지는 것.
그것이 부모가 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사는 멜번니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