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오니 스티븐은 정신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다음 미팅에 들어가기 전, 그는 어제 있었던 일을 짧게 설명해 주었다. 시어미니의 상태가 어제 많이 좋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의 현재 상태는 기억력이 왔다 갔다 하는 상태다. 치매 초기 증상이다.
어제저녁에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돌아가신 시아버지가 집에 오지 않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계속 불안해했고, 스티븐에게 전화를 여러 번 걸었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영국행 비행기 표를 다른 사람에게 줘버려 지금 갈 수 없다고 생각했고, 급기야 말레이시아에 있는 크리스에게 새벽에 전화를 걸어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피곤했다. 퇴근 직후였고, 몸은 쉬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오늘 그녀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래서 그녀를 데리고 그녀가 좋아하는 쇼핑센터로 갔다. 그녀와 점심을 함께 먹고, 천천히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의 내용은 특별하지 않았다. 그녀가 갈 영국 이야기, 손녀와 손자들 이야기, 돌아가신 시아버지 이야기.
하지만 그 시간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문득 주변을 보니 우리 모습이 눈에 띄는 것 같았다. 동양 남자와 백인 할머니가 함께 있는 모습. 많은 사람들이 익숙하게 보는 조합은 아닐 것이다.
대부분 돌보미는 동양 여성과 백인 노인의 조합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어디를 가든 조금 더 눈에 띈다. 신기하게 우리를 바라보았다. 호주에서는 동양 성인 남성이 할머니를 돌보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시선을 의식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은 다른 무엇보다 그녀에게 집중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녀에 기분을 살피고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약 두 시간 정도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처음보다는 조금 안정된 모습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시어머니 집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그녀가 필요한 것이다.
그녀의 집으로 돌아와 나는 자연스럽게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무엇이 있는지, 무엇이 부족한지. 그리고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적었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은 거창한 일이 아니라 이런 작은 확인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먹을 것이 있는지, 약은 있는지, 혼자 생활이 가능한 상태인지.
오후에 행복이를 픽업해야 했기에 사실은 조금 쉬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스스로에게 말하는 핑계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그런 내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시간을 내어주었다. 완벽한 선택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의미 있는 하루였다.
아마 지금의 나는 시어미니를 돌보는 입장으로 조금씩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하지 않으면 그녀의 상태가 더 빠르게 나빠질 수도 있다는 것을 자식들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호주는 개인주의다. 자신이 먼저다. 하지만 나는 한국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선택했다. 억지로가 아니라, 기꺼이. 자식들이 하지 못한 시간을 내주고, 조금 더 그녀와 함께하고, 조금 더 곁에 있어 주기로.
삶의 방향은 이렇게 조용히 바뀌는 것 같다. 어느 날 갑자기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의 선택이 쌓여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 같다. 그리고 목요일에 그녀를 다시 만나기로 했다.
나는 지금 시어미니를 위해 변화의 길 위에 서 있다.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사는 멜번니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