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행복이 반 참관 이후 담임 제니퍼에 향한 나의 마음이 분노와 원망으로 변했다. 어쩌면 그렇게 되는 것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아니면 예상을 했는지도 모른다. 어떻든지 나는 이제 대놓고 그녀를 싫어하기로 했다.
지금 나에게는 이 모든 사건을 책임져야 할 분노와 원망의 대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럴수록 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누구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그래서 마음의 평온을 찾을 려고 노력하는데 지금 나에게 가장 힘이 되어 주는 것이 기도다.
요즘 더욱 교회 기도 모임 사람들과 친해졌다. 그들은 나를 안아 주고 지지해 주었다. 나는 그들의 기도를 통해 마음에 위안을 얻었다.
처음에는 그냥 인맥을 쌓기 위해 나간 모임에서 그들과 친분을 만들었고 그들의 따뜻한 마음씨에 종교에 관한 마음의 문을 다시 열기 시작했다.
어쩌면 내가 종교인을 바라보는 관점이 잘못되었는지 모른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걔명이 없느니라(막 12:30-31)
자신을 스스로 탓하며, 모든 문제의 근원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제게 ‘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정말 어려운 말이다. 특히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사랑뿐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하게 아는 사람만이 그 사랑을 흘려보낼 수도 있다. 나는 이 단계에 도달하지 못했다. 어쩌면 평생 도달하지 못할 것 같다. 왜냐하면 진심으로 남(내가 진심으로 미워하는 사람)을 받아 드리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모임사람들이 이런 나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었다.
행복이가 문제가 있다고 학교에서 듣고 나서부터 나는 그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싶어서 매일 고민하고 그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매주 기도 모임에 참여했다. 무엇이 나를 이토록 힘들게 하였을까?
그것은 나 자신이다.
내가 문제라는 것을 알지만 자식을 너무 사랑하고 그 욕심이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였다. 나는 그렇게 나 스스로를 힘들게 했다.
그런데 기도 모임에서 한 엄마가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신의 아들이 교통사고로 머리가 다쳐서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아이가 가끔 이상한 행동을 하는데 그것을 가지고 아이들이 놀리고 담임은 그것을 방치해서 너무 화가 나서 교장 선생님에게 항의했다고 한다. 그런데 학교에서 피해를 본 엄마에게 그녀의 아들을 전학시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가해자를 벌하는 것이 아닌 피해를 본 사람이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렇다 학교는 학교에 이익을 고려해서 결론을 내린다. 아무래도 피해를 본아이가 정상 범위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도 너무 힘들어서 모임에 참여한다고 했다. 그리고 나보고 힘내라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에게는 내문 제 만 중요했다. 나는 남의 큰 상처 보다 내 손톱 가시가 훨씬 더 아팠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문제는 보지 못했다. 그런데 종교 모임에 참여하는 다른 엄마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내 고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이들이 정말 많은 문제를 가지고 그것이 힘들어서 참여한 사람들이 많았다. 한 엄마는 아들이 자폐아라고 한다. 그래서 아들이 장애인들이 다니는 특수학교에 다니고 있다. 그리고 다른 한 아이 엄마는 딸이 난독증이라고 한다. 그 부모님들은 이미 나와 다른 레벨에 있는 사람들이다. 종교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극복한 그들이 대단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같은 위대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동안 내가 받은 고통의 책임이 나에게만 있는 것일까? 담임 제니퍼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 당시 나에게 기도 모임이 없었다면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 그래서 다시 한번 나를 위해 기도해 준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그들의 상처를 보고 내 상처를 돌아보면서 위안을 삼았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도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것로부터 마음의 위안을 받았다.
그리고 반 참관 이후 나는 담임 제니퍼가 미웠다. 당하고만 살아야 하는 것일까? 과연 그것이 맞은 것일까?
그것을 고민하는 나는 종교에 다닐 자격이없는 사람이다.왜냐하면 할 수 있으면 행복이 담임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다.
이 마음이 나를 힘들게 했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내 속에서 꿈틀거렸다.그것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적을 용서하고 거기에 사랑하고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나는 착한 사람도 만만한 사람도 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요즘은 교회 기도 모임대신 명상을 주로 한다. 걸으면서 하는 명상이 나에게 기도 대신 힘이 되어준다.
기본적으로 종교에서 가르치 것은 선하고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착한 사람들을 좋아한다. 나도 그런 착한 사람을 좋아하고 착한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만만해 보이고 싶지도 않다. 세상을 살면서 배운 이치다. 이것이 내가 세운 원칙(만만해 보이지 않기)이다. 그래서 나는 나답게 살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나쁜 사람으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