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유

2015년 1월 15일(과거 이야기)

by Ding 맬번니언

행복이가 잠들었다. 이때 아니면 점심을 먹을 시간이 없기에 어서 점심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허겁지겁 먹다가 문득 주방에 서서 먹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내 꼴이 말이 아니겠군' 벌써 샤워를 며칠째 못했을까? 머리는 감지 못해 기름기가 돌더니 이제 떡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머리를 감을 세는 없다. 아까 행복이가 먹은 분유가 마지막 분유이기 때문이다. 아마 잠에서 깨면 배가 고플 텐데 이럴 수가.. 정신없이 먹은 그릇을 대충 치우고 잠든 행복이의 모습을 다시 한번 확인한 후 정신없이 슈퍼로 뛰어갔다.


"압타밀 있어요?"

"안으로 들어가 봐요"

"어디요?"

"G열로 가봐요"

"고마워요~”

행복이는 호주 얍타밀 분유를 먹는다. 호주 얍타밀은 뉴질랜드의 청정지역에서 깨끗한 풀을 먹고 자란 소의 젖을 이용해 좋은 성분이 많이 들어간 분유이다. 행복이가 아기 때에는 분유만 먹으니 나는 어떤 분유를 먹여야 할지 정말 오래 고민하고 알아본 다음 결정했다. 아기들이 먹는 분유가 얼마나 종류가 많던지...정말 처음엔 앞이 막막할 정도로 많은 종류 때문에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다행히 그렇게 고르고 고른 얍타밀을 행복이가 너무 잘 먹어주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정신없이 달려가 구해온 분유를 들고 다시 집에 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세상에...슈퍼 점원이 미친 남자인 줄 알았겠다..'


엘레베이터 거울에는 내가 아는 멋진 호주의 파티장을 휘날리고 다니던 유명 파티 보이 비렐 영은 온데간데없었다. 분유냄새 나는 후줄근한 옷, 짝짝이로 신은 신발, 언제 감았는지 냄새라도 날 것 같은 떡진머리의 남자가 서 있을 뿐이었다. 너는 누구냐라는 생각으로 나는 한참 거울을 쳐다보았다. 예전엔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다고 생각할 만큼 꾸미지 않으면 집 현관 밖으로는 한발 짝도 나가지 않았는데, 이런 몰골로 아기 분유를 사러 슈퍼까지 다녀오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군. 지금 이 모습을 보고 내가 디자인한 옷을 입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다. 꾸미는 게 무엇인가. 부엌에 서서 먹을지언정 제때 밥을 챙겨 먹고 씻고 화장실에 가서 인간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배변조차 마음 편히 하지 못한 나의 현재가 엘리베이터 거울 안에 그대로 비치는 듯했다.


근데 참 신기하지. 그 현실이 그렇게 비참하거나 슬프거나 억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면 웃겠지만 내 비록 이런 꼴이지만 마음만은 그 어떤 화려하고 완벽한 옷을 입고 꾸미고 나갈 때보다 더 뿌듯함이 넘쳤다. 지금까지 감기가 잠깐 걸렸던 것을 빼면 행복이가 너무 건강하게 잘 먹고 자며 자라고 있지 않은가. 내가 행복이를 이렇게 잘 키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훈련병 같아"

"훈련병"

내 인생에서 가장 초라하고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군 복무 시절까지 떠오르다니. 거울을 보니 혼자 웃프다.


지금 나는 막 군대에 온 것 같다. 그것도 훈련병 정도 레벨로 군대 가기 전 시기로 온 것 같다. 입대 전 형들로부터 아무리 많은 군대 이야기를 들어도 실제로 경험하기 전까지 모르는 것이 군 생활이다. 그래서 군필만 아는 그런 것, "군대? 가보고 말해 안 간 사람이라는 말 안 한다." 와 "아기? 키워봐야 안다. 안 키워보면 몰라." 아기 돌보는 것이 딱 그 느낌이다.

혼자 엘리베이터 거울을 한참 쳐다보며 군대 추억까지 곱씹다 보니 어느덧 엘리베이터가 마지막 층에 도착했다. 꼭대기 펜트하우스, 우리의 집. 친구들과 파티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던 이 집을 우리는 행복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살았고 참 좋아했다. 이곳에서 정말 많은 파티와 추억을 쌓았는데 이제 몇 달 뒤 행복이를 위해 이사를 하기로 해서 이제 이 집과도 이별이 다가온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데 은근히 긴장이 된다. 마치 어릴 적 읽었던 '시골쥐와 서울쥐' 이야기에서 시골에 놀러가는 서울쥐가 되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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