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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넬리몰리 Oct 21. 2021

전세 유목민의 이삿날

돈이 있으면 이사도 행복할걸


 내 배우자는 상경하고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살았다. 그 나이 젊은이들이 상경해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곤 고시원이나 원룸이다. 그럼에도 정든 집을 두고 그들은 서울로 올라올 수밖에 없다.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야 하니까.


 나는 이 시대 젊은이들이 상경하는 루트 중 가장 일반적인 루트를 밟았다고 생각한다. 서울지역에 있는 대학에 합격하고, 어느 정도는 부모님의 지원을 빌어 딱 20세가 되는 입학철에 이 넓은 도시 어딘가에 터를 잡는 것. 기숙사가 될 수도 있고 자취방이 될 수도 있고 하숙집이 될 수도 있다. 나는 기숙사 2인 1실을 썼고 식당에서 아침저녁을 해결했다. 그런 생활이 이어지다가 졸업과 함께 나도 자취 생활에 돌입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실감이 났다. 이 거대한 도시에서 혼자서 살아간다는 것.


내가 상경할 때까지만 해도 하숙집이 그리 찾기 힘들지 않았다. 하숙집 고르는 팁도 동기들 사이에 돌아다녔다. 주인아주머니의 반찬 맛을 미리 보고 들어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실천에 옮기는 경우는 거의 전무했다. 동기 중 두어 명이 하숙집에 살았고 하숙집에 사는 것은 거의 대개가 남학생이었다. 그들의 집에 놀러 가 보면 왜 하숙집을 고집하는지 이해가 갈 만한 꼬라지였다. 이렇게 애 혼자 달랑 보내 놓으면 생활이 말이 아니겠구나, 그리 짐작한 부모님들이 식사라도 챙겨 먹게 하려고 하숙방을 잡아 주신 거겠지.


 사회 초년생 시기이자 20대의 마지막 해였다. 나는 맨 처음 내 연인의 집을 구경하러 갔을 때 조금 놀라기도 했고 심난하기도 했다. 2층짜리 건물의 옥상에 지어진 아담한 옥탑방이었다. 나름의 정취가 있기는 했지만,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그 건물까지 들어서는 길이 무서웠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가산동 초입새를 걷다 보면 담배냄새와 바닥에 눌어붙은 껌, 침 따위가 흔했다. 나는 20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내가 겪고 있는 자취 생활을 떠올렸다. 자취 생활의 루틴이란 별반 다르지 않다. 그저 조금 더 열악한 환경이 있고 조금 더 나은 환경이 있을 뿐이다. 이제 우리 세대는 하숙집을 찾지 않는다. 불편하고 고되더라도 타인의 개입이 없는 공간, 그것이 요즘 우리가 찾는 자취방이다.





 망원동에 가면


 "못 사는 동네에서 빨리 벗어나야지." 이게 당시 말버릇이다. 그런데 어디가 못 사는 동네고 어디가 잘 사는 동네인지 자세히 구분해 본 적은 없다. '못 사는 동네'라는 것은 그냥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는 말이었다. 지금 내가 감내하고 있는 이 불편함, 귀가할 때 겪는 내 삶에 대한 실망, 더 나은 환경에 대한 희망 등등을 묶어 지칭하는 것이 바로 '못 사는 동네'라는 단어다.


그래서 당연한 수순으로 우리가 이사 갈 '망원동' 또한 그 어떤 모종의 상징이 되었다. 이삿날을 기다리며 우리는 종종 말했다. "얼른 망원동에 가고 싶다." "망원동에 가면." 사실 그 동네가 어떤 동네인지도 잘 몰랐으면서. 단지 젊은이들이 놀러 자주 간다는, 그야말로 핫하다는 수식어 외엔 제대로 알지도 못했으면서 그렇게 줄기차게 말했다. 누군가에게 "나 망원동에 살아."라고 말하면 내가 내 삶의 일정 수준을 달성했다는 표지판이라도 되는 것처럼.


 부동산 중개인을 따라 처음 탐방해본 망원동은 사실 가산동과 별반 다르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길이 비슷했고 집 앞마다 쌓인 쓰레기도 비슷했다. 단지  중국인이 보이지 않고, 젊은이들이 조금 더 많이 눈에 띄고, 곳곳에 젊은이들이 다닐 만한 작은 가게들이 있다는 점이 달랐다. 나는 내 또래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동네에 간다는 사실만으로 크게 흥분했다. 너무 적지도 너무 크지도 않은 보증금의 1.5룸에 계약금을 걸고 돌아오던 때엔 모든 것이 막연하고 좋게만 느껴졌다.



 분노의 이사


 가산동에서 망원동으로 이사 가던 날, 나는 감격에 찬 우리의 얼굴을 상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이삿날이란 불편과 때로는 분노로 들끓는 날이다. 돈이 오가야 하는 이해 관계자만 몇 명인가. 게다가 고된 노동은 인간을 사납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마법의 단어인 '돈'은 언제나 부족한 아이템이다.


 싼 값에 이사를 해주기로 얘기가 되어 있던 이들이 어떤 이유에선가 이사 당일 갑자기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이제 30대 초반에 들어서는 우리 세대는 큰돈을 쓸 때 주저하지 않는 것으로 이미 이름났지만, 그건 그 돈을 쓸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영역에 한해서다. 그 외의 주거 비용이나 세금 등은 최대한 아끼기 위해 잔머리를 학습한 세대, 그것이 우리다. 사업자등록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이삿짐 센터와 얘기해뒀던 우리는 이사 당일 낭패를 봤고, 입주청소를 부를 돈이 아까워 직접 청소에 나선 어느 친구는 이사 후 일주일간 앓아누웠고, 포장 이사 비용을 아끼려고 용달 기사만 부른 다른 친구는 용달 트럭에 제가 포장한 짐이 다 들어가지 않아 길바닥에서 포장을 다시 했다.


 어느 한 곳에서 살다가 다른 곳에서 살기 위해 옮겨간다는 것. 인간의 하루 생활에 필요한 물품, 공간, 여유 같은 것들을 모두 들어 옮겨야 한다는 것. 나는 20대 전반을 고정된 삶의 주소 없이 이사 다니며 보냈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사회인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던 학생 시절이었으니까. 그러나 30대에 접어들고 직장생활과 자취생활을 병행하면서는 의문이 꼬리 없이 떠 다녔다. 나는 왜 어디에 가서건 '임시 생활'처럼 생활하고 있을까? 월세, 전세 살이라서 그런 걸까? 어차피 이사해야 할 걸 알아서? 혹은 돈이 부족한 것이 직접적인 이유일까?


 어찌어찌 이사를 도와줄 기사님 한 분을 섭외했다. 엘리베이터 없는 옥탑방에서 엘리베이터 없는 빌라 5층으로의 이사였다. 그날 하루는 아주 고되고 자괴감에 가득 찼다. 핸드폰을 붙들고 종류가 다른 욕 수천 가지를 퍼부었다. 이삿짐이 계속 날라져 들어오는 동안 되는대로 마구잡이 청소를 했다. 어떤 모양의 공간이건 사람은 그 안에서 살아야 한다. 살려면 청소도 해야 하고 이쁜 모양의 조명이나 과일이 그 안에 있어야만 한다. 내가 뽑아낼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을 뽑아내야 하니까.


 이사를 끝내고 망원동에서 늦은 식사로 자장면을 먹었다. 나는 어찌어찌 자취 생활의 형태라는 피라미드에서 한 계단을 올라선 기분이었지만 여전히 불행했다. 그럼에도 이 불행한 기분의 유통기한은 오늘 하루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어찌 되었건 여기에서도 즐거운 일은 발견될 것이고, 우리는 그날그날의 즐거움을 좇아 살게 될 터였다. 그 즐거움에 집중하는 힘을 기른 세대, 그것 또한 우리다.






 망원동에 이사와 바로 첫 겨울을 난 우리는 다섯 번째 겨울을 눈앞에 둔 지난주에 망원동을 떠나 왔다. 망원동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따로 살던 우리가 결혼을 했고, 차를 사서 서울 밖으로 다닐 기동력을 얻었고, 직장과 성격이 바뀌었다. "얼른 망원동에 가고 싶다." 그 말은 이제 효용 가치를 다 한 것처럼 느껴졌다. 삶의 어느 기점에서인가 그런 순간이 온다. 뭔가를 강렬히 원해야 하는 시기. 그래야만 그 다음 계단, 그 다음 계단으로 갈 수 있다는 긴장감이 하루하루를 맴도는 시기. 그 와중에서도 맛있는 것을 먹고,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무언가를 찾아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시기.


 30대 중반. 망원동을 떠나며, 이제야 내 삶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지점에 왔다. 여러 번의 이사를 거치며 알게 되는 발자취. 어떤 드라마건 종반부에 와야 그 이야기의 완결성을 확인할 수 있듯, 인생이라는 시간도 그런 것 같다. 아직 갈 길이 한참 남았지만, 이제야 나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 보인다. 손에서 놓고 떠나와야 알 수 있나 보다. 그렇게 망원동을 떠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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