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沒入)의 역주행
인생을 살면서 때론 역주행(逆走行)의 묘미(妙味)에 빠지는 일이 있다.
물론 도로 위 역주행은 절대 아니다. 도로 위 역주행은 법을 찾아보니 상당한 벌금과 과태료, 심하면 구류까지도 살게 되는 처벌이 수반된다. 그리고, 자칫하면 큰 사고로 이어져 인명이 손상되는 엄청난 결과도 가져올 수 있기도 하다.
그런 위험천만한 역주행 말고, '몰입'을 불러오는 역주행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첫 역주행
나의 첫 역주행의 기억은 2000년대 초반 IT열풍과 함께 전국을 들썩이게 했던 플랫폼 '아이러브스쿨'이다.
아이러브스쿨은 1999년 KAIST 박사과정에 있던 분이 동료들과 150만 원으로 사업을 시작해 1년 만에 500만 명의 회원을 확보했던 학연(學緣)을 연결해 주는 플랫폼이었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플랫폼 내 출신학교별 그룹에서 온라인으로 연결이 되고, 오프라인에서 수시로 모임을 갖게 되면서 전국을 동창회 열풍으로 몰아넣었었다. 나는 출신 중학교가 당시에는 귀했던 남녀공학을 나온 탓에 특히 활발한 활동을 했었던 것 같다. 뭐랄까? 외모는 어른으로 성장하였지만, 기억과 마음은 중학교 때 머물러 있는 이중의 페르소나들이 만나서 만들어 내는 인티머시(Intimacy)는 묘한 중독성을 발휘하며 사람을 빠져 들게 했던 것 같다.
이제는 중년이 되어 버린 지금, 아이러브스쿨 서비스가 우리 곁에서 사라진 지도 오래되면서 그때 그 친구들은 어찌 살고들 있는지 많이 궁금하다... 그때 보다도 훨씬 더 발전된 시대를 살고 있지만, 나의 게으름과 무지 탓인지 그들과 연결될 수 있는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두 번째 역주행
나의 두 번째 역주행은 소위 IPTV(Internet Protocol TV)의 등장으로 가능했었다.
인터넷 스트리밍 기술이 발달하면서 드디어 2006년 국내에도 처음으로 IPTV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지금이야 IPTV, OTT*(넷플릭스, 티빙 등), 유튜브 등과 같은 VOD*방식이 흔하지만, 당시의 VOD 중심의 IPTV 등장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방송사에서 재방송을 편성해 보여 주지 않더라도, 언제든지 내가 보고 싶은 방송을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OTT(Over-The-Top)는 인터넷을 통해 제공되는 동영상 콘텐츠 서비스를 의미함. 기존의 IPTV나 케이블 TV와 달리, 인터넷만 있으면 TV, 스마트폰, 태블릿, PC 등 다양한 기기에서 자유롭게 시청할 수 있다.
VOD(Video On Demand, 주문형 비디오)는 사용자가 원하는 영상을 원하는 시간에 선택하여 시청할 수 있는 서비스임. 기존 TV 방송은 정해진 시간에 맞춰야 하지만, VOD는 영화를 보듯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콘텐츠를 재생할 수 있는 방식이다.
2008년 소위 '막장 드라마'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S본부의 '아내의 유혹'은 나의 금요일 밤을 역주행으로 환하게 밝혀 주었던 것 같다. 일주일간 지친 몸과 마음이었지만, 말도 안 되는 스토리의 막장 드라마를 이어서 보는 즐거움은 그 피곤함을 남의 일인 것처럼 느끼게 해 주는 데 충분할 정도로 몰입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평소에는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나이지만, 어쩌다 한 번 보게 된 드라마의 역주행은 나를 무섭게 몰입형 인간으로 변신시켜 주었다. 최근에는 세계적 작품인 '오징어게임'과 김남길 배우가 주연한 '열혈사제'에 빠져 집에서 리모컨을 독점했었다.
나는 지금 행복한 역주행 중
최근 새로 역주행 중인 행복한 일은 큰 딸과의 애정전선이다.
큰 딸이 태어난 무렵 나는 새로운 부서로 이동하여 낮과 밤의 구분이 없이 일을 하고 살았었다. 그 부서의 오랜 조직문화 탓에 우리는 '월, 화, 수, 목, 금, 금, 금'이 일상화되어 있었고, 저녁을 먹고도 한 명의 예외 없이 사무실 복귀, 열두 시가 다 되어 퇴근하면서도 열외 없는 한 잔 술에 나는 찌들어 있었다. 그러니, 첫 애를 낳은 기쁨도 잠깐, 아이가 커 가는 귀여움과 이를 바라보는 행복함은 남의 일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심지어 잠깐의 휴일이 생긴 틈에는 그다음 주를 보내기 위한 체력 비축의 시간이었기 때문에 잠깐의 육아에도 짜증을 내고, 힘들어했던 부끄러운 아빠였다.
그것도 모자라 아이가 세 살이 되던 해에는 6개월 단신으로 중국 연수를 가게 되면서 도무지 나와 큰 딸은 서로의 존재를 알아갈 기회가 없게 되었다. 나의 부재중 딸아이가 식구들 모임에서 이모부를 보고 아빠라 그러고 따라다녔다는 웃지 못할 슬픈 이야기를 한국 복귀 후 들으면서 많은 생각에 잠겼던 기억이 선하다.
이후 많은 반성을 하였지만, 회사생활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없었고, 아이 또한 점점 성장해 가며 자연스럽게 아빠와 거리를 더 두는 결과가 만들어졌다. 사춘기를 지나면서는 절정에 달했던 것 같다.
딸아이는 지금 대학 2학년이다.
나는 체질적으로 술을 잘 못하는데, 딸아이는 양쪽 할아버지들의 무한 주량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는지, 술을 좋아하고 잘 마시기도 한다. 나 또한 퇴직을 하고, 코칭을 공부하며 말 한마디 건네는 것도 신경을 써서 하게 되고, 그동안의 과거에 대한 죄책감으로 시간을 일부러 만들어서라도 딸아이와 술자리를 가지고 있다. 술 한잔 들어가면 서로에 대해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끄집어내고, 서로의 생각을 충분히 이야기하곤 한다.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딸아이도 이제 많이 큰 것 같다. 생각도 깊고, 주관도 뚜렷하고... 나에 대한 서운함도 또박또박 논리적으로 이야기한다. 여유가 생긴 것일까? 과거에 대한 후회와 죄책감일까? 내가 변해 가는 것일까? 그런 딸아이가 밉기보다 고맙기만 하다. 어제처럼 아주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낸 경우는 철벽을 치던 딸아이가 과감하게 볼뽀뽀도 허락을 해 준다... 어제는 둘 다 취해서 허그를 몇 번이나 한 건지...
"그래, 그동안 우리가 서로를 너무 몰랐어. 서로 사랑할 시간을 많이 잃어버렸고. 당분간 신나게 역주행하자꾸나... 다시 정주행의 사랑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원 없이 역주행하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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