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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

2부. 장사의 시작 001) 장사의 시작

by 우상권

수능을 치르고 난 전력질주를 하고 난 뒤 온몸에 맥이 빠진 사람처럼 한동안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기력도 없어 밥맛도 없었고 학교가는 것도 더 이상 흥미도 없고 모든 것이 나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나의 못난 점수에 맞춰서 계명대학교 토목공학과에 특차로 입학이 결정이 되었고 나처럼 대학교가 정해진 친구들은 하나둘씩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나도 무엇이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하루하루가 지루하고 기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친구의 소개로 들어간 곳은 대구 동성로에 있는 보세 신발 가게였다. 출입문도 없이 셔터를 올리면 입구에 물건을 가득 진열해두고 길가는 사람들을 손길이나 말로 유혹해서 매장으로 입점을 시켜서 신발을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예전에 찹살떡 장사를 했던 기억에 나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첫날 둘째날 그리고 셋째날까지 고객님들께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사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고객님께 말도 한마디 붙이지 못하는 나를 해고시키지 않고 나를 믿고 기다려 주셨으니 말이다. 그때 해고를 당했다면 나는 지금 나의 모습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첫월급을 받는데 그 당시에는 계좌로 급여를 입금 받는 것이 아니라 하얀색 편지봉투에 현금을 넣어서 받았다. 사장님께서는 월급 받는 사람들을 매장에 줄을 서게 하시고 뒷창고에 있는 커다란 금고를 조심스럽게 열어서 한명씩 뒷 창고로 부르시고는 수고했다는 인사와 함께 두세 번 꼼꼼하게 헤아린 돈뭉치를 하얀 편지 봉투에 넣어서 주셨다. 월급이 들어간 하얀 봉투에는 사장님께서 정성스레 적으신 “ 수고하셨습니다.” 가 적혀있었다.

25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그 월급봉투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나만의 초심박스에 담아두었다. 한 번씩 나에게 초심이 필요할 때면 월급봉투가 담겨진 초심박스를 꺼내고 냄새를 깊숙이 맡는다. 참 이상하게도 눈을 감고 낡은 월급봉투에 코를 대고 호흡을 길게 마시면 그 시절의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그때에 비하면 참 많은 것을 이룬 어른이 되었지만 그래도 그 시절의 초심은 언제나 가치가 있다. 일을 시작한지 석달이 될 때쯤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고객님이 매장에 방문하시면 그 당시 경력자 순서대로 고객을 응대하였는데 판매 보조를 하던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조금씩 배우게 되고 고객님이 안계실 때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가끔씩 여러 고객님께서 한꺼번에 입점이 되면 내가 손님을 보게 될 기회가 생길 때도 있었는데 어떻게 하다가 판매까지 이루어지면 나의 심장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릴 정도로 흥분이 되었다. 나는 대학교를 정상적으로 진학을 하고 평일에는 저녁에 나와서 일을 했고 주말에는 종일 근무를 했다. 학교와 완전 다른 환경이기에 나는 20살 때 부터는 이중생활을 했다. 학교에서는 그냥 잠만 잤다. 공대수업이라 이상한 기호만 칠판가득 적혀있었고 재미도 없고 어렵기도 하고 때때로 교실에 앉아있는 내가 여기 왜앉아서 잠만자고 있는지도 몰랐다. 대학교 등록금도 내가 힘들게 돈을 버는 것보다 훨씬 비싼 돈을 내면서 까지 말이다. 어느날부터 내 나름대로 효율적 삶을 살겠다고 스스로 선언을 하고 아침에 어머니께 학교에 다녀온다고 하고는 시내 일터로 버스를 탔다. 그렇게 학교는 가지 않고 매일 일터에서 나의 일상을 보냈다. 조금씩 나의 일솜씨가 능숙해지기 시작했고 매장 선배들이 장사 잘한다며 엄지척을 할때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어릴적 새학기가 시작되면 통과의례인마냥 담임선생님께서는 아빠없는사람 엄마없는사람손을 들라고 했고 집이 자가인지 전세인지 월세인지까지도 철저하게 조사를 했다. 지금생각해보면 아무 중요한 것도 아닌데 아주 중요한 업무인 마냥 심각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조사를 하고 그 과정에서 나와 같이 편모편부가정에서 자라거나 집이 없어 월세를 내는 친구들은 늘 어깨가 축 쳐져 있기도 하고 주변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학교를 가서도 성적에 따라 분류가 되어 입학을 하고 아마다 취업을 할 때에도 토익점수와 졸업한 대학교를 따지고 물으며 또다시 여러 등급으로 나뉘어 삶을 살아갈 것이 뻔했다. 하지만 내가 장사를 하는 현장에서는 나의 과거스펙을 따지고 묻는 고객은 단 한명도 없었다. 고객을 응대하는 순간 최선을 다하면 고객님은 나의 친절함과 우리매장의 물건을 보고 흔쾌히 돈을 쓰시고 물건을 사가셨다. 점점 내마음속에는 세상에서 가장공평한 공간이 장사라는 생각이 짙게 물들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학교가 아닌 일터에서 더욱 살아 숨 쉬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하루종일 서서 하는 일이다보니 몸은 조금 고됨이 있었지만 마음만큼은 너무나 즐거웠다. 얼마 후 사장님께서는 귀금속가게를 추가로 차리셨다. 오픈한 곳은 자리도 시내 한중에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월세가 아주 비싼 황금자리였다. 그 당시 오픈멤버로 시내에서 가장 장사를 잘한다는 우리매장의 에이스인 선배와 내가 가게 되었다. 그 에이스 선배와 함께 일하는 것 만으로도 너무나 설레이는 일이었고 나에게는 너무나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두 명을 더 뽑아서 총 4명에서 귀금속 매장을 오픈하고 장사를 시작하였다. 신발만 판매를 하다 생전 처음 접하는 귀금속 장사였지만 결국 장사는 매 한가지였다. 품목만 다를 뿐이지 판매하는 방식은 조금씩 같음을 느끼게 되었다. 어느 주말 한 커플이 가게로 들어왔고 그때는 커플링 존에 가장 장사를 잘하는 에이스가 고객응대를 하는 것이 우리만의 룰이었지만 에이스인 선배가 식사를 하는 중이라 내가 대신 응대를 하게 되었다. 이것저것 보여주면 한참을 애써 설명하였고 중간 중간 시간을 좀 더 끌기 위해서 음료수를 드리며 고객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다. 그리고 입에 단내가 날정도로 긴 시간을 응대를 하고 결국 고객님은 구매를 하지 않고 좀 더 고민해보겠다며 매장 밖을 나가셨다. 못 팔아서 속상했고 살 것처럼 하고는 안사가신 고객님에 대한 원망에 또 한번 속상했다. 시계를 보니 얼추 5시간 가까이 응대를 했던 것이었다. 에이스 선배가 나의 두 눈을 깊숙이 보며 잘했다고 어깨를 스다듬어 주었다. 형이 응대를 했어도 아마도 못 팔았을 거야..라고 말하며 위로를 해주었다. 그리고 밥을 먹는데 괜 시리 눈물이 났다. 에이스 형에게 한번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는데..멋지게 판매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서 슬펐고 에이스 형에게 진심으로 인정과 격려를 받게 되어 눈물이 났다. 그리고 몇 일뒤 주말이 되어 또다시 활기차게 장사를 하고 있는데 그때 5시간 동안 응대를 했던 커플이 양쪽 부모님을 모시고 방문한 것이었다.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가 인사를 했고 그 커플은 그때 너무 미안했다며, 결혼예물이라 부모님과 함께 상의를 해야해서 그날 구매를 하지 못했다며 고개숙여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날 그 커플의 고객님은 650만원치를 구매를 해가셨고 나의 개인기록 판매를 올려주셨다. 그때의 깨달음은 이랬다. 진심은 통하고 끈질김은 그 언젠가 보상을 받는다. 괜히 그때 고객님을 원망한 마음이 되려 죄송하기만 했다. 그렇게 나는 하루하루 장사에 푹 빠져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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