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 때문에 공포를 느껴본 적이 있는가? 40여 년을 살면서 별의별 일을 다 겪어봤지만, 나는 오늘 세탁기가 무서웠다. 청소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고, 정리할 짐도 없고, 그래서 세탁기를 청소하기로 했다. 오자마자 세탁조 청소를 한 번 돌리기는 했는데, 빨래감에서 불쾌한 냄새가 조금 나는 것이다. 그래서 챗대리한테 물었더니, 고무패킹과 세제통을 청소하란다. 그래, 해야지. 나는 깔끔이니까.
먼저 세제통을 솔로 박박 씻었다. 그리고 고무패킹 안쪽에 행주를 넣어 쓱 닦았는데... 귀신 머리카락 같은 검은곰팡이물때가!!!!!
꺄아아아아아악!!!!
식음을 전폐하고 자리보전하여 눕고 싶었다. 나는 왜 여기에 왔는가. 차마 실명을 밝힐 수 없는 남편 회사는 왜 이런 사택을 나에게 주었나. 그 동안 세탁기 고무패킹을 아무도 안 닦은 것인가. 판도라의 상자를 연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이제 나는 세탁기를 마주할 수 있을까.
밖은 화창했다. 첫 주는 폭설에 계속 비만 내리고 우중충 그 잡채더니, 귀신의 집에 입주한 후로는 날이 좋아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지, 약이 올라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이들 학교 끝나고 놀이터에서 노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햇살이 야속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날이 좋음 뭐해, 집에 세탁기 귀신이 사는데...
어떤 여자애가 다가와 아들들과 같이 놀기 시작했다. 아직 놀이터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집 아이들을 위해 그 여자애는 사다리를 잡아주는 등 친해지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그 모습이 고마워서 나도 말을 붙였다. "오빠는 있니?" 이 학교에 보통 형제를 보내니까. 그런데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원래 없는데, 언니들이 생겼어요." 잉??? 이건 무슨 소리? 그랬더니 이 꼬마아가씨가 술술술 집안 사정을 말한다. "아빠는 출장 갔고, 엄마는 아파서 한국 갔어요." "그럼 저 분은 누구니?" "모르는 이모에요." 잉?????
그 이모가 내게 다가와 설명하는데, 아이 말이 다 맞았다. 아빠가 아는 집에 애를 맡기고 출장을 간 거다. 어제부터 모르는 이모네서 생활했다고 한다. 그런데 저렇게 씩씩하다고? 야무지다고? 대, 대단한데?? 너 캔디니?
그래, 내가 좌절하면 안되지. 송편이(이름이 송편 비슷함)도 먼 타지에서 엄마 없이 아빠 없이 굳세게 사는데. 우리 둘째도 엄마를 위해서 학교에 가는데-엄마의 히어로가 되고 싶어서, 말도 안 통하는 교실에 매일 들어가는데, 엄마가 좌절하면 안되지. 세탁기 따위에 지면 안된다. 세탁기 귀신을 처리하자.
다시 전의를 다지며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을 씻기고 있는데 누가 띵똥. 올 사람이 없는데??!!!! 세탁기 보고 놀란 가슴, 초인종 소리에 놀란다고... 누가 왔지? 설마하고 문을 열다 독일사람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떻게 오셨어요?!
"네, 우리는 앞집 사는 사람이에요. 이웃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독일에서는 이웃이 이사 오면 이렇게 빵과 소금을 선물하는 풍습이 있어요. 저도 옛날에 미국에서 살아본 적이 있어서 타지에 오면 얼마나 낯설고 힘든지 잘 압니다. 저의 이름은 앤이고, 우리 아들들은 플로리안과 알렉산더에요. 지내면서 독일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보세요. 카드에 제 번호를 써 놨습니다. "
커다란 빵을 주며 따뜻한 미소를 짓는 생면부지의 앞집 사람 앞에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정말 감사합니다. 독일 쉽지 않네요. 이렇게 반겨주시니 감동입니다." 내 얼굴보다 큰 빵,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독일빵을 소중히 받아들었다. 그래, 독일은 나쁘지 않아. 굳센 송편이와 따뜻한 빵이웃 고마워요. 우리 잘 지내 보아요.
오늘 세탁기 때문에 충격을 받고 힘들었다. 하루종일 우울했었는데, 위로 받고 싶었는데, 좌절하지 말라고 하늘에서 메시지를 보내준 것 같았다. 저녁을 먹고 배수필터를 열고 마개에 잔뜩 낀 곰팡이를 박박 닦았다. 건조기 필터에 시커먼 보풀도 박박 닦았다. 하여간 박박 다 닦았다.
하지만 고무패킹 속에 다시 손을 넣을 용기는 도저히 낼 수 없었다. 닦아도 닦아도 계속 나올 것 같은 물귀신 머리카락 같은 검은곰팡이물때.... 그 촉감, 그 색깔, 그 냄새.... 결국, 세탁기 회사에 전화했다. 내일 와서 갈아주세요, 고무패킹.
EMS 말고 또 기다리는 게 하나 더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