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 영화·출판 시장의 변화
이 글은 제가 연재 중인 SF로 보는 20세기의 5장입니다.
각 글은 개별적으로 읽을 수 있도록 구성되었습니다.
50년대는 SF 영화와 SF 소설이 붐을 일으킨 시대였습니다. 50년대 대표 SF 영화를 뽑자면 지구가 멈추는 날(1951)과 금지된 행성(1956), 고지라(1954) 정도가 있습니다. SF 소설 또한 50년대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대표적으로 구시대의 인류가 멸망하고 신시대의 인류가 탄생하여 우주로 승천한다는 내용의 유년기의 끝(1953), 벌레형 외계인과의 전쟁을 다룬 밀리터리 SF 스타십 트루퍼즈(1959), TV에 중독된 인류가 책을 불태우는 암울한 미래를 그린 화씨 451(1953), 그리고 로봇 3원칙이 등장하는 아이, 로봇(1950)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주류 작가는 아니었지만 21세기에 와서 주목받는 필립 K.딕과 할란 엘리슨의 소설들도 있겠네요.
50년대 SF 영화와 소설은 60년대 티비 SF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예를 들어보자면 지구가 멈추는 날에 나오는 외계인 '클라투'는 인류에게 분쟁을 멈출 것을 촉구하며 평화를 설파합니다. 그리고 이 내용은 스타트렉에서 반복됩니다. 하지만 스타트렉에서는 차이가 있지요. 미지의 외계인이 인류의 분쟁을 막는다는 스토리가 인류가 미지의 외계인의 분쟁을 막는다는 스토리가 됩니다.
스타트렉 TOS의 에피소드 아마겟돈(A Taste of Armageddon)은 엔터프라이즈호 일행이 500년째 전쟁 중인 두 행성의 컴퓨터를 파괴해 전쟁을 멈추는 에피소드입니다.(참고로 이들의 전쟁방법은 굉장히 이상한데 바로 컴퓨터가 가상의 폭탄을 던지고 그 피해를 계산해 그만큼의 시민들이 자살시설에 들어가는 방식입니다.)
전쟁을 멈추면서 주인공 커크 선장은 너희는 너무나 전쟁을 깔끔하게 만들어서 멈출 이유를 없애버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류는 과거 수백만년간 야만적으로 싸워왔지만 이젠 멈출수 있게 되었다며 인류가 성장하여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정리하자면 이 에피소드는 과거 50년대 SF 영화와 달리 인류를 전쟁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가르칠 수 있는 성장한 존재로 그렸습니다.
또한 고지라(1954)에서 괴수 고지라는 개인이 개발한 옥시즌 디스트로이어라는 폭탄에 의해 죽습니다. 그리고 이 무기는 악용될 수 있다며 무기를 개발한 세리자와 박사는 고지라와 함께 생을 마감하죠. 그러나 울트라맨(1966)에서 이와모토 박사는 젯톤을 죽이는 펜슬 폭탄을 개발하지만 세리자와 박사와 달리 죽는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이와모토 박사가 과학특수대, 그리고 인류가 이 무기를 악용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고 실제로 이를 뒷받침하는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참고로 세리자와 박사와 이와모토 박사의 배우는 히라타 아키히코(平田昭彦)로 같습니다. 사실상 고지라를 죽인 사람과 젯톤을 죽인 사람이 같은 겁니다(ㅋ).
제작진이 의도한 건 아니더라도 50년대에는 인류, 그리고 시스템을 불신하던 과학자가 60년대에는 인류와 시스템을 신뢰하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옥시즌 디스트로이어와 펜슬 폭탄이 핵폭탄을 상징한다는 해석을 생각해보면 더 재미있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과거 핵(원자력)을 어떠한 일이 있어도 다시는 쓰지 말아야하는 무기처럼 여겼던 인류가 60년대에는 핵(원자력)을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긍정적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는 낙관적인 믿음이 생겼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도대체 10년 사이에 뭔 일이 있었길래 사람들은 이렇게 낙관적인 믿음을 갖게 되었을까요? 단지 시간이 흘러서는 아닙니다. 60년대는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세대(베이비 부머)의 탄생과 전 장에서 설명했듯 우주개발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또 경제는 연일 최고치를 갱신했고 복지 체제도 잡혀가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뒷 장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당시 사회상은 낙관적 믿음을 가지기 충분했습니다.
다음으로 금지된 행성입니다. 금지된 행성은 스타트렉 TOS와 구성이 비슷합니다. 실제로 스타트렉의 아버지 진 로덴베리가 금지된 행성에 감명을 받아 스타트렉을 만들었다 할 정도니깐요. 선장과 의사, 논리적인 로봇의 3인방은 스타트렉의 커크, 멕코이, 스팍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금지된 행성과 스타트렉 TOS에는 큰 차이가 존재합니다. 금지된 행성은 인간의 내면(이드)를 두려워하며 비극적으로 끝을 맺지만 스타트렉은 그마저도 극복하고 우주로 나아갑니다. 50년대 영화가 남긴 하드웨어에 60년대 특유의 소프트웨어(낙관주의)가 설치된 셈입니다.
그럼 이번엔 소설로 넘어가보겠습니다. 소설들도 60년대 티비 SF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향에 낙관주의라는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60년대 SF 드라마들은 설치했지요. 앞에 언급했던 영화들보다 더 냉소적으로 인류 그리고 사회를 바라보는 작품들이 50년대 소설엔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 냉소적인 시각은 상당부분 거세된 채 60년대 SF 드라마에 이식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60년대 SF 드라마에서 어두운 이야기를 하려는 시도는 아예 없었을까요? 사실 있었습니다. 그것도 낙관주의를 가장 잘 보여주는 드라마 스타트렉 TOS에서요. 이에 대해 알아보자면 앞에서 잠시 언급되었던 작가 할란 엘리슨을 다시 끌고 와야합니다.
할란 엘리슨의 대표작은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친 짐승',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소리를 질러야한다'가 있습니다. 두 작품 모두 암울한 세계관, 잔인한 전개, 충격적인 결말로 유명합니다. 할란 엘리슨은 스타트렉 TOS의 최고 에피소드로 뽑히는 '시간의 문(The city on the edge of forever)'의 각본을 맡았습니다. 할란 엘리슨은 스타트렉의 낙관적인 색채 대신 마약, 전쟁 범벅인 잔인한 느낌의 각본을 썼습니다. 하지만 그가 쓴 각본 그대로 방영되지 않고 제작진들의 의해 강제로 밝고 서정적인 분위기의 각본으로 바껴서 방영되었습니다. 할란 엘리슨과 같은 당대 최고의 SF 소설가 조차 SF 드라마에서 불고 있는 낙관주의의 파도에는 거스를 수 없었던 겁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알고 넘어가야할 점이 있습니다. 비록 스토리는 당시 주류 SF 소설, SF 영화들의 영향을 받았을지 몰라도 당대 SF드라마는 비주얼 상에선 펄프 픽션과 코믹북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바로 전 장에서 다뤘던 거지만 SF 드라마의 비주얼은 50년대 유행한 펄프 픽션과 코믹북의 알록달록함의 기원이 있습니다. 참고로 펄프 픽션이란 작품성보다 장르의 재미를 우선적으로 추구한 소설이라고 보면 편할 것 같습니다. 요즘의 웹소설과 비슷한 위치라고 할 수 있겠네요.
스타트렉 승무원들의 알록달록한 옷 색깔, 울트라맨의 은색 타이즈, 썬더버드의 화려한 메카는 모두 바로 싸구려 취급 받던 펄프 픽션과 코믹북에서 가져온 겁니다. 60년대 SF 드라마의 제작진들은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선 수준 높은 스토리가 필요하지만 동시에 펄프픽션과 코믹북에서 찾을 수 있는 원초적인 재미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약하자면 60년대 SF 드라마들은 50년대 SF 영화와 소설의 무거운 주제의식 위에 펄프픽션과 코믹북의 가볍고 원초적인 재미를 입혀 새로운 대중문화를 창조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 장에서 60년대에 SF가 유행한 이유 세가지를 한번에 다룬다고 밝혔으나 분량이 지나치게 길어진 관계로 남은 두 이유는 월요일에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재밌게 읽으셨다면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