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둥이들
이 도시에 이렇게 허름한 골목이 있다니, 케이와 수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붉게 녹슨 낡은 함석지붕이 연달아 있는 골목은 보도 블록이 군데 군데 비어 있어 며칠 전 내린 빗물이 아직 그대로 고여 있었다. 밑이 비어 있는 보도 블럭을 밟으면 아래서 물이 삐적 소리를 내며 튀어올라와 스타킹을 적셨다. 약도 대로 골목을 돌아 대문이 없이 담벼락만 있는 마당 깊은 집에 도착했다.
마당이고 집이고 짐이 쌓여 있어 어수선한 이 집은 그간 수미와 케이가 주로 다녔던 철학관과는 다른 점집이다. 신내림을 받아서 한다는 무당 집이다. 집을 수리하려는 계획으로 짐들이 다 나와있는 건지 아니면 원래 이렇게 정리 안 된 상태의 집인 건지 알 수 없었다. 산신도가 걸려 있고 빨간 무당 모자를 쓴 카리스마 넘치는 무당을 생각했는데 뽀글머리에 몸빼를 입은 시장 채소전에서 마주칠 법한 옷차림의 아주머니였다. 오히려 무당 카리스마가 없어서 편하게 느껴졌을까? 케이와 수미는 자주색 교자상을 사이에 두고 무당 아주머니와 마주 앉아 시작한 이야기가 길어졌다.
"남자 사주를 보니 평생 여자 구설수가 따라댕기겠어. 잘 생각했어. 그만 만나."
케이는 화가 났다. 바람둥이라니. 이건 케이의 계획, 아니 예상 밖의 치명타다.
"아니 근데 제가 예전에도 그런 남자랑 사귀려다 끝났거든요. 왜 그런 남자들만 만나게 되는 거예요?"
"그게 자기 운이야. 사람이 착해서 남자 보는 눈이 없네. 그게 싫으면 그런 바람둥이 끊어내는 굿을 해. 부적도 쓰고. 부적은 좋은 사람 만나라는 부적이지."
흔히들 굿을 한단다. 달력을 보여준다. 군데 군데 누군가의 이름이 적혀있고 시간과 참석인원등이 적혀있다. 서울서도 오고 광주, 여수, 부산 대중 없이 굿을 하러 온단다. 사업 잘되라고, 자식 운빨 터지라고, 조상님 좋은데 가라고 말이다. 굿값은 200도 받고 500도 받고.
망설이는 케이의 표정을 본 아줌마는 50만 받고 간이로 해준단다. 그렇게 해도 효험이 있나? 그러나 이미 코가 꿰인 케이는 50주고 앞으로 바람둥이를 다 걸러낼 수 만 있다면 결코 비싼 가격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케이, M이 날 오래전부터 사랑하고 있었대. 나도 그랬던것 같아."
"그럼, 나는?"
케이는 J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에서 쿵 소리가 나는 걸 들었다. 바닥 쪽을 향해서 가슴이 내려 앉은 것 같았는데 그리곤 가슴에 통증이 밀려왔다. 아, 가슴이 이렇게 아플수가 있구나. 다리가 저리듯 몸통 한복판이 이럲게 저릴 수도 있구나 했다. J가 M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다는 것은 사귀어 보기로 마음먹은 순간에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큰 관심이 없기에 대부분 흘려 들었고 그냥 독특한 20대 아가씨 정도로 생각했다. 늘 헐렁한 원피스에 노팬티, 노브라의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들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케이는 어느 유명 화가의 뮤즈를 떠올렸다. 세상에는 독특한 사람 천지이고 케이 자신도 스스로 편견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M에게서 갑작스런 편지를 받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여러 종류의 인간관계 소통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런 작은 호감과 소통은 그들만의 비밀이 되었다가 폭탄이 되어 케이 앞에서 터졌다.
이렇게 가슴의 통증을 느껴본 것은 생전 처음이었기에 케이는 '내가 진심을 주었구나.' 라고 생각했다. 며칠 간의 가슴 통증과 무기력에서 빠져나왔을 때 그 둘의 선 넘은 무례함 때문에 케이는 모멸감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에게 화가 났다. 자신을 이렇게 대우하도록 놔둔것. 사귀는 여자에게 예전부터 마음에 두던 여자가 있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예의라고는 없는 파렴치한을 알아보지 못하고 좋다고 쫒아다닌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화가 났다.
J도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M도 파렴치한으로 느껴졌다. 그런 예의도 염치도 의리도 없는 자에게 진심을 다했던 케이 자신이 한심해서 한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