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취적 사랑-너희에게 미래는 없어
케이는 생각한다. J와 M의 그 파렴치한 사랑에 대하여. 그들의 사랑이 과연 진정한 사랑일까 의심하면서 한편으론 결국 그들이 어서 깨져서 심적 타격을 받길 원한다. 세상에 의리없는 놈들은 절대 상대하지 않으리 다짐하면서 말이다. 저려오던 가슴이 안정을 되찾은 뒤로 심장이 떨어졌던 그 자리는 공허하게 비어 있었다. 분노와 욕지거리로 채우려고 애써봤지만 그것은 참으로 스스로 초라해지는 지름길이었다.
날이 슬슬 온화해지면서 교장선생님은 학교 텃밭에 고추모종을 내었다. 아침에 출근하여 교무실에 모두 모여 미쓰리가 제조해주는 커피를 마실 때면 이미 교장선생님은 텃밭에서 아침일을 마치고 온 뒤였다. 교직원 모두 교장선생님을 존경하고 좋아했다. G선생님이 귀띔해준 바에 의하면 교장선생님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데 큰 아들이 간암이었고 작은 아들을 설득하여 간이식을 형에게 해주게 하였다고 한다. 작은 며느리를 설득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아들을 잃고 싶지 않은 간절한 마음이 통했나보다. 두 아들네 가정의 일체 생활비는 교장 선생님이 감당하고 있는 듯 하다. 물론 단 한 번 내색한 적이 없고 교장선생님이 얼마나 간절하고 절실한 세월을 보내고 있을지는 그저 가늠만 해 볼 따름이다. 다만,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침에 두 시간 농삿일을 하고 등교하는 아이들을 맞이하는 일상을 보내는 그 모습이 기도하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고 케이는 생각한다.
케이는 자신이 시작하려고 했던 사랑에 대해 생각해본다. 다행히도 부모들이 하는 사랑이 아니라 숭고하지도 무겁지도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가? 케이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상황을 조절하고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져야하는 그런 숭고한 사랑이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저 욕지거리나 내뱉고 애들이 매일 일으키는 기상천외한 말썽들에 대응하다 보면 하루해가 금방 가버리는 젊은 청춘의 사랑이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생각한다.
그 썩을 것들. J와 M은 그들 스스로의 의리없음과 파렴치함으로 인해 오래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사랑은 첫눈에 반해 도취된 사랑일 뿐으로 콩깍지가 벗겨지면 그대로 사그라들 열정이다. 그러면 또다른 열정을 찾아 헤매다니겠지.
이쯤에서 케이는 생각한다. 무엇이 J에게 호감을 느끼도록 했는가? 우선 대화가 통한다고 생각했다. 케이는 어떤 주제이든 심지어 종교와 관련된 금기까지도 유쾌하고 담담하게 대화하길 바랐다. 한계없이 자유로운 생각으로 세상을 관대한 시선으로 보고 싶어하는 성향이 J와 맞았다고 착각했던 것 같다. 알고보니 J는 그냥 제멋대로 사는 의리없는 놈일 뿐이었는데 말이다.
심리학자 로버트 스턴버그는 성숙한 사랑을 만드는 삼각 구조를 말했다. 친밀감과 열정, 헌신이 바로 그것이다. 청춘 남녀가 만나면 열정이야 금방 생길 수 있는 것이고 친밀감도 절로 따라올 것인데 가장 어려운 것이 헌신이다. 케이는 헌신의 결정판을 보고 자란 사람이다. 바로 나이차가 엄청나게 나는 부모님이다. 두 분은 각각 서른과 18세에 만나 평생을 함께 하셨다. 6.25전쟁으로 정혼자를 잃고 반과부가 된 처자와 홀아비의 만남으로 시작하여 평생을 서로에게 헌신했다. 케이가 원하는 미래의 모습니다. 다만 그들이 헌신으로 시작하여 점차 친밀감과 열정을 차차 키워나갔다면 케이는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열정과 친밀감에서 헌신으로 마무리 하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훌륭한 마음을 가진 케이를 몰라보다니 J 그 놈은 복을 차버린 것이라고 생각하며 케이는 피식 웃는다. 그리고 의리없는 놈을 사랑할 뻔한 자신을 용서하고 자신 앞의 생을 기도하는 자세로 일궈나가리라 다짐한다. 햇살이 케이의 가슴을 가득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