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짓는 아이들

작은 책 한 권의 상상력

by 원쌤

조금 일찍 퇴직을 하고 여러 가지 다른 일을 하다가 코로나 시기부터 시간강사를 하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임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다행히 정년이 늦춰진 덕분에 매일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수업을 하다 보면 학급분위기가 천차만별이다. 마이크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산만하고 소란스러워 한 시간 수업만으로도 탈진되는 반이 있다. 그런가 하면 마이크 없이 작은 소리로도 충분히 수업이 가능할 만큼 집중력이 탁월한 반이 있다. 물론 그런 반에도 장난꾸러기들은 있지만 적당하게 질서 있고, 적당하게 즐거우며 적당하게 장난치는 아이들의 표정은 해맑고 편안하다.

시간표에 나온 과목만 가르치는 시간강사는 끝없는 잡무와 아이들 생활지도까지 책임지는 담임보다는 좀 더 느긋하고 편안한 수업이 가능하다. 게다가 대부분 하루나 이틀 정도의 단기간이라 부담이 거의 없다.


출근할 때 가방에는 재미있는 책이 한 권씩 들어있다. 수업이 일찍 끝나거나 창·체(창의적 체험활동으로 교과 외에 인성, 창의성, 진로탐색 등을 기르기 위한 비교과 활동) 시간에는 제목을 가리고 책을 읽어준 후, 각자 책 제목을 지어보라고 한다. 그런 후 아이들이 지은 기발하고 재미난 제목을 읽어주다 보면 아이들보다 내가 더 설레게 된다. 아이들이 지은 제목에서는 그 아이의 성별과 성격이 짐작된다 그리고 그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또, 지금 제일 관심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알게 된다. 저학년일수록 생생하고 호기심이 톡톡 튀는 재미난 제목이 많다. 가끔 한 반에 한 두 명은 처음 접하는 책인데도 원래 제목과 똑같은 제목을 짓기도 한다. 신기하게도 그런 아이들은 전형적인 모범생, 또는 우등생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1학년 아이들이 지은 제목과 3, 4학년 아이들이 지은 제목은 확연히 다르다. 1학년들의 제목에는 자유분방함과 엉뚱함, 뚜렷한 개성이 많이 나타나는 반면 학년이 올라갈수록 원래 제목과 비슷하거나 똑같은 제목이 많다. 즉 상상력을 느끼기 어려운 정형화된 제목이 많이 나온다. 천방지축 자연인에서 사회화되고 길들여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지만 조금은 아쉽다. 언제나 정답만을, 그것도 남보다 빠르게 찾아내기를 강요하는 조급한 어른들 때문에 아이들은 상상의 세계에 충분히 머무르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이 아이들에게 너무 빨리 자라기를 요구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상상력 제로인 어른이 지은 제목 <작은 파란 의자>를 3학년 아이들은 이렇게 바꿨다

<아주 딱 좋아>, <오래된 기억>, <여행하는 의자>, <붕붕 떠올라 파란 의자> <작은 의자의 여행>, <왔다 갔다 의자 여행>, <여행을 떠난 파란 의자>, <부의 소중한 파란 의자>, <모두의 의자>, <부의 의자는 돌고 돌아.....>, <세계여행하는 부의 의자>, <주인이 돌고 도는 파란 의자>, <다시 돌아오는 의자>, <발 없이 돌아다니는 작은 파란 의자>


제목에 '의자'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단어에 집중하면서 정답 찾기에 벌써 익숙해지는 느낌이다.


1학년 아이들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토끼의 의자>를 이렇게 멋지게 바꾸었다.

<알밤의 이사>, <음식을 주는 의자>, <동물들에(의) 행복한 아무나 의자>, <아무나 먹어도 된다구(고)?>, <도토리들의 아기는 알밤들>, <잠의(을) 자면 박이는(바뀌는) 음식>, <당나귀의 아주 긴 낮잠>, <도토리의 진화>, <잠쟁이 당나귀>, <음식이 자꾸자꾸 변하네!!! >, <아무나 먹어도 되니다!(됩니다)> <알밤은 변신쟁이>

1학년들은 단어보다는 전체적인 내용 자체에 집중하는 편이다.

같은 내용을 듣고도 자기와 전혀 다른 제목을 짓는 친구들을 보면서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사람들이 모두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표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오히려 세상에는 나와 다르게 생각하거나 표현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다른 사람에 대한 넉넉한 이해심이 생기지는 않을까!


책 속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이들은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꼭꼭 눌러쓴 단어 속에 아이들의 마음과 생각이 담긴다. 상상으로 마음을 열고, 생각을 표현하며 함께 자라는 아이들을 보는 이 시간이 참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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