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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안 Mar 31. 2024

아침에는 부활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오늘 예배 때 목사님의 설교 중 기억에 남는 것. 우리가 사순절은 특별 새벽 기도회도 하면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40일 동안 묵상하는데, 부활절은 딱 하루 기뻐하고 가볍게 끝나는 것 같다고. 부활 신앙이 기독교의 핵심인데 사순절이 끝나는 것에만 의미를 두는 것 같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성경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자들일 거라고. 왜냐? 부활이 없다면 어차피 죽는 걸로 다 끝날테니까. 그냥 죽어서 먼지처럼 사라지는 게 끝이라면 뭐 하러 이 좋은 날씨에 교회라는 곳에 모여서 예배드리고 있느냐는 거다.



부활은 단순히 죽음 이후 또 다른 삶이 있다는 것만 뜻하지 않는다. 부활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믿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상처, 아픔, 슬픔, 고통을 비로소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아픔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신앙 안에서 해석이 되고 치유되기도 하지만, 어떤 아픔들은 끝까지 나에게 고통을 주는 가시가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시다고 고백하는 게 신앙인데, 이 믿음바로 부활 신앙 때문에 가능하다.



지금 당장은 이해할 수 없어도, 시간이 흘러도 나의 이 고통과 상처가 해석이 되지 않아도, 부활의 때에 하나님께서 이 모든 아픔의 이유를 알게 해 주실 것이리란 믿음. 하나님의 선한 뜻이 분명히 있을 거란 믿음. 바로 부활 신앙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께 기댈 수 있다.

 


사순절이 지났으니 이제 우리는 기독교의 핵심인 부활 신앙을 붙들고 살아야 한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삶에서 마주하는 크고 작은 고난을 버텨내고 또 버텨낼 수 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더라도 끝까지 선하신 하나님을, 내가 다 이해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을 붙잡을 수 있다.



최근 김영민 교수의 '나는 왜 아직 살아 있는 가'라는 짧은 글을 인상 깊게 읽었다. 책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의 개정판 서문인데, '죽음'이 들어간 곳을 '부활'로 한 번 바꿔 니 이렇다.



아침에 '부활'을 생각하는 것은 아침에 직장 상사를 생각하는 것보다 낫다. 밀린 과제를 생각하는 것보다 낫다. 당일 스케줄을 생각하는 것보다 낫다 ...

엎질러진 물을 생각하는 것보다 낫다. 실패한 농담을 생각하는 것보다 낫다. 옛 애인을 생각하는 것보다 낫다. 원수를 생각하는 것보다 낫다.

아침에 부활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아침에 일어나 단련된 마음의 근육으로 부활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부활을 생각함으로써 삶을 병들게 하는 뻔뻔한 언어들과 번쩍이는 가짜 욕망들을 잠시 몰아낼 수 있다.



이게 바로 부활 신앙으로 사는 게 아닐까 싶다. 아침에 부활을 생각하며 다시금 희망을 갖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 변한 것 없는 현실이라도 다시 한번 부딪혀 보는 것. 마음이 흔들리고 믿음이 요동쳐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 사랑의 끈을 다시 붙잡는 것.



40일의 사순절이 끝났으니 이제 남은 한 해는 부활의 소망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지. 이해되지 않아도, 크고 작은 고난에 지쳐도, 상처가 아물지 않아도, 다 포기하고 도망가고 싶어도, 부활이 있기에 나는 하나님을 끝까지 붙잡고 버텨봐야지. 안 그럼 뭐 별 수 있나? 이왕 하나님을 믿기로 했으니 끝까지 한 번 믿어보는 밖에.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부활을 생각하는 게 더 좋다. 가장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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