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보다 '함께'

by 김이안


중2 때 급식을 먹자마자 뛰면서 놀다가 체한 적이 있다. 어찌나 속이 거북하고 답답하던지 체한다는 것의 고통을 제대로 실감했다. 책상에 엎드려 있기도 하고, 살살 걸어보기도 했지만 '체'기는 도통 가라앉질 않았다. 이때 '개장수'라는 별명을 가진 '박장수'라는 친구가 곁에 있어 주었다. '야, 괜찮냐'하며 그저 점심시간 내내 옆에 있어주었는데, 이때 그 친구를 다시 봤다. 평소 무심한 표정과 약간은 시크하고 조용히 지내던 친구.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것의 따듯함과 소중함을 이때 처음 깨달았다.


성탄절을 앞두고 목사님께서 "이해보다 함께"라는 주제로 예배 중 설교를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기에 이미 우리의 희로애락과 모든 감정 또한 이해하신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의 작은 지 같은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이해'가 아니라 '함께'에 방점이 있다고.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깨닫게 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해 주셨다.


얼마 전 송지영 작가님의 <널 보낼 용기> 북토크 중 어떤 분이 한 질문이 생각난다. 양극성 장애와 우울증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지인에게 어떤 도움을 줘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물음. 그러자 작가님은 그런 질환을 겪는 당사자들도 어떤 도움을 받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결국에는 그저 함께 있어 주는 것이 최선의 도움 아닐까?


하지만 함께 있어준 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묵묵히 내 시간을 내어줘야 하고, 내가 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에 공감하는 데는 그만큼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니까. 보이지 않지만 절실히 내민 그 감정의 손을 잡아주는 일에는 분명 애씀과 노력이 요구된다.


'공감은 미래에 내게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에 마음을 기울여 보는 일'이란 문장에 비추어보면, '공감'과 '함께 있어줌'에는 일종의 '상상력' 또한 필요한 게 아닐까. 곁에 있어주는 나라는 존재 자체가 그 사람에게는 한줄기 빛과 따스한 온기가 되고 있다는 믿음. 나에게도 언제든 일어날지 모르는 일을 겪을 때, 내 마음은 어떨지 가만히 생각해 보는 것 등.


예상치 못한 장벽에 갇혀 앞날이 막막했던 시기, 내게 시간과 곁을 내어준 이들을 떠올려 본다. 논문 통과가 안 돼 졸업이 미루어져 모든 스탭이 꼬여버렸을 때, 아산에서 서울까지 올라와 밥을 사주고 격려해 줬던 W. 도무지 어떻게 헤쳐가야 할지 두렵고 막막한 때, 갈피를 못 잡는 나와 동행하며 함께 알아보고 움직여줬던 S 등. 돌이켜보니 어둡고 캄캄한 시간들 속에 내게 다가와주고, 함께 있어준 이들이 있었구나. 이들이 내어준 시간과 마음 덕분에 내가 삶의 고비들을 넘길 수 있었음을 다시금 깨닫는다.


삶이란 본디 '엉망진창'이어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일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훨씬 더 많이 일어난다. 또한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내가 누군가를 이해하려 한다고 해서 얼마나 이해할 수 있겠나. 나도 나 자신을 잘 모르겠거늘. 그럼에도 이해하려는 노력은 지속되어야 한다. 동시에 이해를 넘어 곁을 지켜줄 수 있는 너른 마음과 무거운 시간을 견뎌줄 수 있는 인내도 필요하다.


크리스마스에, 나와 끝날까지 함께 하신다는 메시지를 다시금 되새겨 본다. 이해하기 힘든 '나'라는 인간을 올 한해도 견뎌주고, 함께해 준 가족과 지인들에게 새삼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얼매나 고생이 많았을꼬. 음, 연말, 어떻게든 이 마음을 작게나마 표현하고 전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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