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와, 마라탕과, 인생

by 김이안


"아빠 1은 매울껄? 0.5가 딱 좋을 거야"



딸아이와 마라탕 집에 갔다. 아이에게 있는 마라탕 쿠폰이 오늘까지라 저녁 메뉴의 선택권은 따로 없었다. 마라탕 집에 가니 이미 학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아직도 마라탕이 애들한테 인기가 있구나. 마라탕후루루. 탕후루 집은 이제 많이 안 보이던데, 마라탕은 여전한가보다.


아이가 세숫대야 만한 그릇을 건네고 원하는 재료를 담으라 한다. 면, 채소, 햄, 새우, 등 각종 식재료들이 다양하게 진열되어 있다.


"아빠, 면은 옥수수면이 맛있어. 그리고 치즈떡사리 이건 꼭 넣어야 하고"


아직도 어리둥절해 있는 나를 향해 아이가 차근차근 안내한다. 아이는 곰돌이가 윙크하고 있는 특이한 모양의 어묵인지 떡사리인지 모를 토핑을 추가하고는 흡족해한다.


이제 국물을 선택할 차례. 0부터 5까지 맵기의 정도가 있다. 아니, 1이 신라면 정도의 맵기라면, 도대체 5는 얼마나 매운 거야.


"저는 0으로 주세요" 아이가 말한다. 그리고는 내게,


"아빠 1은 매울껄? 0.5가 딱 좋을 거야" 조언한다.


아니, 그래도 성인 남자이자, 아빠의 자존심이 있지, 0.5가 뭐람. 쩜오가 뭐냐? 나는 자신 있게 1을 선택한다.


곧이어 마라탕 두 그릇이 나온다. 백색&누런색 마라탕과 나의 짬뽕국물 색의 마라탕이 대조를 이룬다. 내 마라탕에는 초록한 채소들과 소고기 토핑이, 아이의 마라탕에는 흰검의 판다 고물이 수줍게 윙크하고 있다. 이 두 마라탕이 나란히 있는 것만으로도 뭔가 재미가 있다.


국물을 떠먹고, 몇 젓가락 면을 입에 넣으니 식재료들과 국물의 조합이 꽤 괜찮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이 불그레 해지고 땀이 좀 나기 시작한다. 아이는 그것 보라는 듯 0.5가 딱이었을 거라고 말한다.


추가로 아이 또래 여자 아이들과 엄마로 보이는 여자 어른 두 분이 들어온다. 식당 주위를 둘러본다. 희한하게 이 시간대에 남자는 나밖에 없다. 이제 막 들어온 아이들은 대접과 집게를 들고 신나게 재료들을 탐색하고, 자신 있게 대접에 갖가지 토핑들과 면을 담는다. 어느새 홀에는 손님들로 가득 찬다.



마라탕이 왜 이렇게 인기가 있는 걸까? 일단 이유 하나는 찾았다. 바로 내가 직접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토핑. 내가 직접 면의 종류와 그 안에 들어갈 갖가지 식재료들을 고르기에 이때 만들어진 마라탕은 나만의 마라탕이 될 수밖에 없는 거다. 이런 생각을 하며 아이에게도 물어봤다.


"기쁨아, 너는 마라탕이 왜 인기가 있는 것 같애?"


"음 일단, 내가 원하는 거 골라서 넣을 수 있는 거랑~"


그렇지. 나도 같은 생각이다.


"그리고 국물이 맛있어."


아하, 머리에 전구가 하나 켜진다. 그렇지. 아무리 내가 원하는 재료를 다양하게 넣은 들, 국물이 맛없으면 아무 소용없지. 제일 기본 베이스인 국물이 일단 맛있어야지. 암, 그렇고 말고.


그러곤, 뽀얀 하얀색의 아이 마라탕 국물을 한 번 먹어본다. 맵기 0의 국물은 어떤 맛인가. 오, 근데 나름 진한 맛의 국물이 맛있다. 그래, 역시 국물이 맛있어야, 이 국물이 모든 식재료들을 포용하고 융합하고 조화를 이뤄내야 마라탕이 완성되는 것이다.


어느덧 면과 사리들을 다 먹었다. 그런데 막상 일어나려니 아쉬워서 국물을 한 숟갈 먹는다. 두 숟갈 먹는다. 분명 맵고, 배도 부른데, 이 국물에 중독성이 있다.


아이와 함께 간 식당에서는 식사 후 아이스크림을 무료로 하나 가져갈 수 있었다. 맵게 달궈진 혓바닥에 달콤한 아이스크림으로 마무리라. 크으 사장님, 탁월하시네. 장사하실 줄 아시는구나. 마음속으로 엄지척을 두 번 하며 아이스크림 냉장고로 간다. 쌍쌍바와 메론바 사이에서 심각하게 고민하다 결국 쌍쌍바를 택한다. 아이가 메론바를 골라서. 쌍쌍바 반쪽 하나와 메론바 한 입을 교환하자고 해야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삶의 본질일지라도, 무수한 변수와 장애와 어려움이 휘몰아치는 인생이라도, 그 속에서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힘들더라도 내가 선택한 길에 대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돌아보니 그랬다. 가벼운 만족감이 아니라 진한 사골 국물 같은 뿌듯함과 충만함이 그런 순간들에 배어 있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이 시점에, 지난날들을 매듭지으며 생각한다. 변화무쌍한 날씨와도 같은 인생일지라도, 나 스스로 내게 필요하고 양분이 될 것 같은 책을 선택하고 읽으며 정신의 날을 갈자고. 감정 또한 내가 선택해서 불필요한 자책감과 후회의 수렁에서 너무 오래 널브러져 있지 말자고. 이렇게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고, 선택에 따른 대가를 치르며 한 걸음 한 걸음 또 나아가자고 다짐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며 통합하기 위해서 좀 더 성숙한 인격과 다정함을 갖자고 마음먹는다. 아무리 어떤 실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인격이 안 되면 뭐 하나. 인격이 갖추어지지 않은 실력은 남을 해치는 칼 밖에 더 될까. 여러 사람 피곤하고 괴롭게 하는.


조금 더 너른 마음과 성숙한 인격을 가진 사람. 그리고 마음과 말이 따듯한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다.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럴 때 시너지가 발생하고, 나 또한 주변의 선한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받을 수 있으니까.


딸아이와 생각지 못한 마라탕을 먹으며 한 해를 마무리한다. 마라탕처럼, 내가 직접 면과 토핑을 선택하고 진한 국물이 조화를 이루는 하루하루, 새해를 기대하며. 새해에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꿋꿋이 일상을 살아내며, 좀 더 다정한 사람이 되기를 다짐하며. 모두모두 해피 뉴 이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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