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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그레잇 Mar 03. 2020

넘어지는 법을 배워야 일어날 수 있다.

북리뷰, 잘 넘어지는 연습

체험은 있는데 표현을 못해


나는 축구 중계를 볼 때 선수 출신 해설자를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부족한 말솜씨에 진부한 표현만 늘어놓으면 오히려 경기 보는데 방해가 된다. 선수 출신은 아니지만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조리 있는 말솜씨로 경기 관람을 돕는 전문 해설자의 중계를 보통 시청하는 편이다. 그러나 전문 해설자에게도 간혹 아쉬울 때가 있다. 분명 의도한 플레이 같은데 실수라고 하거나 실수나 행운이 따른 플레이를 과하게 칭찬할 때 조금 민망하다. 선수 출신의 해설자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스포츠 선수들은 일반인이 겪지 못하는 특별한 체험을 한다. 그들만 겪어 알 수 있는 부분은 선수 출신 해설자만이 전해줄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자. 기다란 장대하나 가지고 5m 위로 날아오르는 기분은 어떨까? 시속 140km로 날아오는 주먹만 한 공을 방망이로 받아쳐 담장을 넘기는 기분은 어떨까? 스키를 타고 아파트 20층 높이에서 거의 수직으로 떨어지더니 갑자기 날아올라 140m를 비행하는 기분은 어떨까? 감히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의 플레이를 눈으로 보면서 그 플레이의 느낌이나 기분을 누군가 실감나게 설명해준다면 관심 없던 스포츠도 흥미롭게 시청하지 않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 선수 출신 해설자들은 그들만 아는 감각을 맛있는 표현으로 전달해주지 못하는 것 같다. 물론 잘 전해주는 선수출신 해설자도 있다. 내 최애 축구 해설자는 이영표 해설위원이다.

그리고 이영표 위원만큼이나 본인의 체험을 잘 표현할 줄 아는 선수출신이 있으니 바로 ‘조준호’ 전 국가대표 유도선수다. 스물여섯,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은퇴를 선언하고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는 그가 2017년 에세이 한 권을 내놓았다. 대부분 유명한 선수들이 자서전을 하나씩 내지만 실은 거의 대필 작가의 작품이다. 대필 작가의 글이 완성도가 더 높을지 몰라도 당사자의 글은 생기가 있어 살아 움직인다.



왜 지는 방법부터 배우는 걸까?


‘잘 넘어지는 연습’,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이 책은  트렌디한 제목과 힙(hip)한 표지를 가지고 있다. 작은 크기와 200쪽 정도의 적당한 분량도 이 책을 한 번 쯤 들어보게끔 만든다. 무엇보다 서론에 밝힌 이 책의 포부가 참 마음에 든다.

조준호 | 생각정원 | 2017
그러니까 이 책은 ‘참 잘 넘어지고’, 또 ‘참 잘 일어서는’ 사람의 이야기다. … 
이 책에는 희망도, 절망도 없다. “죽어라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어요”라는 헛된 희망도 없고, 
“에라이. 아무리 해도 난 안 돼”라는 절망도 없다. -p.10 


이 책은 유도에 대한 에세이도 아니고, 유도인만을 위한 책도 아니다. “잘 넘어지기”가 중요한 모든 현대인의 삶을 위한 유도인 조준호의 이야기다. 유도는 지는 방법(낙법, 넘어지기)부터 배운다는 이 책의 메인 테마는 내 관심을 한 순간에 사로잡았다. 여러 스포츠를 배웠지만, 잘 지는 방법을 배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일단 잘 진다는 표현 자체가 형용 모순이다. ‘침묵의 소리’, ‘찬란한 죽음’, ‘진보적 보수’(재밌는 공부.., 즐거운 훈련...) 뭐 이런 것처럼. 잘 진다니, 이게 말이 되나? 

그런데 지는 법을 잘 안 배우는 건 일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늘 이기는 방법에 대해서 배운다. 공교육 12년 동안 매 학기마다 시험에서 이기기 위해, 궁극에는 대학 입시라는 거대한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 끝난 줄 알았지만 대학에서는 그 나름대로, 취업 후에는 또 그 나름대로, 끝없는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끝없이 이기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조준호는 말한다.


낙법은 ‘지는 방법’이다. ... 그런데도 유도는 제일 처음 낙법부터 가르친다. 왜 지는 방법부터 배우는 걸까? 이유는 하나다. 제아무리 유도 천재라고 해도, 백전불패를 자랑하는 강자라 해도 경기 중에 넘어지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상대 선수의 기술에 당하든, 공격하다가 상대와 같이 넘어지든 어쨌든 넘어질 수밖에 없다. -p.7 


누구든 넘어지기 마련이다. 이길 때도 있지만 반대로 질 때도 있는 법이다. 스포츠에서나 인생에서나 경쟁에서의 승패는 필연적 결과물이다. 내가 이기면 누군가는 지고, 누군가 이기면 또 나는 진다. 그러나 한 번 진다고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 인생이 그러하듯, 경기는 계속된다. 그래서 잘 이기는 방법만큼이나 잘 지는 방법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 잘 넘어져야 잘 일어설 수 있다. 다시 일어서야 또 경기를 할 것 아닌가. 잘 넘어지는 법을 배우지 못한 탓일까. 안타깝게도 한 번의 실패로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우리는 다 넘어진다. 재 아무리 뛰어나도 넘어지지 않을 인생은 없다. 잘 이기는 법만큼이나 잘 넘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조준호의 에세이는 넘어질 수밖에 없는 현대인 모두를 위한 책이다. 넘어지는 거라면, 그리고 다시 일어나는 거라면 유도선수만한 전문가가 없다. 수 없이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야 할 우리 인생을 위해 “잘 넘어지는 연습”이 필요하지 않을까.


조준호 선수


잘 넘어지기, 그리고 잘 일어서기

“왜 하필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 
신의 의도인지, 우연에 우연이 겹쳐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올림픽 역사상 
처음이었던 판정 번복은 수많은 경기들 중에서 ‘하필’ 내 경기에, 수많은 선수들 
중에서 ‘하필’ 나에게만 일어난 일이었다. -p.39~40


올림픽 오심 논란 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경기가 바로 2012 런던 올림픽 남자 유도 66kg급 당시 조준호 선수의 8강 경기다. 만장일치의 판정이 번복되는 올림픽 유도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오심에 진위는 차치하더라도, 이미 3명의 심판이 만장일치로 내린 3:0의 판정이 심판위원장의 개입으로 0:3이 되어버린 모습은 오심의 논란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오심의 진위 여부를 떠나 이 논란이 피해자에게 줄 좌절감과 분노는 상당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한일전. 이 일이 하필 조준호 선수에게 일어났다. 우리나라 비인기 종목 선수에게 올림픽 무대가 갖는 의미를 생각하면 당시 조준호 선수가 받았을 스트레스는 감히 표현하는 것 자체가 실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준호는 잘 넘어질 줄 알기 때문에 잘 일어날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산산조각 날 법도 한 멘탈을 붙잡고 기어코 동메달을 따냈다. 이어진 인터뷰에서 혈안이 된 기자들에게 조준호는 “동메달을 따서 기쁘다고 웃으며 대답했다.” 인터뷰 뒤에 조준호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만약 판정 번복 없이 동메달을 땄더라면 이런 국민적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까?” 
“금메달을 목에 건 수많은 유도 영웅들 사이에서 한판승도 없는 나라는 선수가  
기억에 남았을까?” “이런 일이 하필 나에게 일어나서 다행이다.”
“신이시여! 이건 시련이 아니라 기회였군요!”

깨끗하게 경기 결과에 승복하는 내 모습을 보고 감사하게도 국민들은 더욱 열광해주셨다. 
낯부끄럽지만 진정한 스포츠맨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생전 꿈도 못 꿔본 과분한 관심을 받았고 …
왜 하필 나에게만 이런 일이 벌어지느냐고 통탄했던 그 일이 나에게만 일어난 행운이 되어 
삶의 역전승을 가져다주는 통쾌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삶이란 복잡해 보이지만 단순하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상황과, 
내 의지로 일어나는 선택이 씨줄과 날실이 되어 삶을 지탱한다. 
그렇기 때문에 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상황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상황이라는 씨줄에 선택이라는 날실을 엮는 것뿐이다.  -p.42~43



선수의 죽음: 은퇴


조준호는 그렇게 런던 올림픽을 마치고 조금은 이른 이십대 중반의 나이로 유도복을 벗는다. 모르긴 몰라도 주위의 만류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4년 뒤에도 많지 않은 나이고 오심 논란의 피해자로 아쉽게 동메달을 땄으니 다음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욕심내볼만 하니 말이다. 하지만 이십대 중반의 조준호는 이미 스스로 삶을 개척할 수 있는 주체적 개인이었다.


내가 시상대에 올라 바라본 것은 ‘다음 올림픽 금메달’이 아니라 ‘나의 한계’였다.  -p.69
그때 기분이 어땠냐고? 이제껏 헛짓거리를 했구나 하고 허망하지 않았냐고? 
아니! 너무 행복해서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p.75
만약 내가 그때 한계를 보지 못하고 지금까지 유도를 하고 있었다면 정말 재미없었을 것이다. 
선수라서 방송의 기회도 거의 없었을 거고, 도장을 운영하면서 
어린 친구들을 만나는 일도 없었을 테니 교육에 대해 생각할 기회도 얻지 못했을 거고,
인문학도 접하지 못해 그저 그런 꼰대가 되어갔겠지.
그렇게 한 톨의 후회도 없게, 한 점의 미련도 없게 유도 인생을
아름답게 마칠 수 있었음에 나는 언제나 감사하다.  -p.77


찬란해 보이지만 공허한 은퇴가 있고, 주목받지 못해도 설레는 은퇴가 있다. 시행착오는 있었지만 조준호 선수는 행복한 제2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방송인으로, 지도자로, 작가로. 


우리는 늘 이기기 위해 살아가지만 모든 사람은 결국 죽음 앞에 무릎 꿇고 만다. 알면서도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란 여정에서 우리에게 결국 중요한 것은 이기는 법이 아니라 지는 법일지도 모른다. 운동선수에게 은퇴란 모두가 결국 받아들여야할 죽음의 순간이다.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는 삶처럼, 아름다운 은퇴를 준비하는 선수의 삶이 지혜로운 삶이리라.


이런 세상에서 한 우물만 파는 것만큼 위험한 모험은 없다. 극단적으로 말해, 
한 우물만 파다보면 자기 무덤 파기 십상이다. 한 길을 우직하게 걸어가는 끈기만큼이나 
이 길이 아니다 싶을 때 빨리 발을 뺄 수 있는 용기, 다른 일에 거침없이 도전하는 패기, 
실패해도 훌훌 털고 일어나는 용기가 필요하다. -p.103
대부분은 ‘은퇴하면 코치나 해야지’라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가르침에 대한 충분한 고민 없이 배운 게 운동뿐이라 코치를 하려는 
선수들이 많아질수록 후배들은 제대로 된 교육자가 아니라 
타성에 젖은 선배들에게 틀에 박힌 기술을 배워야 한다. -p.118



운동선수가 책 읽으면 벌어지는 일


극한의 신체 능력을 경험한 운동선수만의 체험과 그 체험에서 비롯된 지혜는 정말 특별하다. 하지만 모든 운동선수가 체험에서 지혜를 얻거나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조준호는 “그래도 책 볼 일이 많아서 이렇게 몇 자 적는다”고 했다. 유도에서 ‘넘어지는 연습의 지혜’를 터득하고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선수가 얼마나 될까? 운동선수가 책 읽으면 깊이가 달라진다. 


칸트가 말하길,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조금 쉽게 말하면, 경험 없는 생각은 쓸모없고, 생각 없는 경험은 의미 없다는 말이다. 운동선수의 체험이 사고(thought)를 만날 때 공허는 사라지고 목적은 분명해진다. 책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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