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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수술하면 안 될까요?

관계시리즈 2. 돌봄의 연대

by 수하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네 번째 여름방학이다.


방학식을 맞아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한 사람은 저녁을 준비하고, 다른 사람은 간식을 준비하고, 나는 아이들에게 나눠 줄 학습 자료를 출력해 정성껏 이름표를 붙였다. 아이들은 떡볶이를 먹으며 요즘 유행하는 K-POP 콘텐츠 영화를 볼 것이고, 우리는 근황에 대해(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가 많지만) 바쁘게 이야기할 것이다.


척하면 척, 이제는 삶의 연대가 된 우리 돌봄의 연대는 어느덧 8년째 이어지고 있다.




벌써 6년 전쯤의 일이다. 며칠 동안 복통이 계속되었지만, 심한 배탈이겠거니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수영장에 가려는데, 어린이집 앞에서 A 엄마를 만났다. 내 안색이 너무 안 좋아 보였는지,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상황을 설명하자, 수영은 무슨 수영이냐며 병원부터 가보자고 했다. 모닝커피도 한 잔 할 겸(덜 아팠는지), 카페 옆 병원에 들렀다. 의사 선생님이 여기저기를 눌러보시더니, 맹장염이 의심된다며 소견서를 써주셨다. 지금 당장 수술이 가능한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것이다. 사실 그때까지도 ‘설마 별일 있겠어’ 싶어 그냥 수영장에 갈까 고민했지만, A 엄마의 권유로 병원으로 향했다.


“바로 수술 준비 들어가시죠. 2박 3일 정도 입원하셔야 합니다.”


“네? 지금이요? 저녁에 수술하면 안 될까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의사 선생님은 당황하다 못해 웃으셨다.


“해결해야 할 일이 있으신가요? 지금 많이 아프실 텐데요.”


통증에 대한 생각은 이미 사라지고, 머릿속엔 온통 아침에 웃으며 헤어진 네 살 아이 생각뿐이었다. 엄마가 갑자기 수술한다는 걸 알면 얼마나 놀랄까. 하원 후 저녁은 누가 챙겨주지? 2박 3일을 어떻게 떨어져 지내지? 남편에게 일단 전화를 걸었다. 만약 나 혼자였다면 아무 고민 없이 수술대에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와 장시간 떨어져 본 적 없는 그 시절의 나는, 아직 마음이 여린 엄마였다. 남편은 최대한 일찍 퇴근하겠다고 했고, 어린이집에 연락하려던 찰나 A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순간, 눈물이 터져 나왔다. 겨우 맹장염일 뿐인데도, 이 상황이 너무 속상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크리스마스 연휴 전이었다.


A 엄마는 나 대신 아이를 하원시켜 저녁을 먹이고, 남편이 아이를 데리러 올 때까지 돌봐주었다. 수술 동의서에 서명하며, 나도 못 본 내 맹장을 본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고맙고도 웃음이 나온다. 이후로도 우리는 병원에 갈 일이 생기면 서로의 보호자가 되어 주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 연대의 시작은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간다. 아이가 두 돌을 넘기고 처음으로 어린이집에 가게 되었다. 늘 처음은 불안하고 감정이 요동치는 법이다. 아이와 인사를 하고 어린이집을 나서는데 내 왼쪽 팔 하나를 두고 온 기분이었다. 아마 그 시절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틀쯤 지나자, 짧지만 달콤한 해방감이 몰려왔다.


감정이 요동치던 그때, 육아의 길에서 종종 만나게 되는 용기 있는 엄마는 여전히 존재했다. 미어캣처럼 멀찍이 내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엄마들을 향해,


“차 한 잔 하실래요?”


적응 기간이라 집에 갔다가 한 시간 뒤에 데리러 오느니 근처 카페에 있다가 데리러 오는 게 낫겠다고 합리화하며 무리에 슬쩍 끼어 본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네요', '왜 놀이터에서 한 번도 못 봤을까요', '우리 아이는 1월생이에요', '우리 아이는 동생이 있어요' 기억나는 대화라곤 이 정도이다. 그때는 이렇게까지 관계가 발전될 거라고 상상조차 못 했다. 그렇게 아이도 나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있었다.


어린이집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했을 즈음, 드디어 오전의 자유 시간이 생겼고, 미뤄두었던 ‘내 일’에 대한 고민이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육아는 내가 경험한 가장 가치 있고도 생산적인 일이었지만, 일에 대한 아쉬움도 늘 남아 있었다. 감사하게도 예전 업무로 복귀하라는 제안도 받았지만, 밤낮없이 일해야 하는 상황을 뻔히 알기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람마다, 시기마다 우선순위는 다르고, 어떤 선택이 정답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나는 조금이라도 우선이라 믿는 것을 선택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면 후회가 덜할 것이라 믿는다. 결국 나는 커리어를 처음부터 다시 쌓겠다는 큰 결심을 하고, 육아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첫 만남 이후, 수업 쉬는 시간에 단톡방을 확인하면 읽지 않은 메시지가 수십 개였다. 단톡방이야 늘 있어왔지만, 아이들이 자라는 만큼 대화의 소재가 다양해지고 활발해졌다. 대화의 맥락을 따라갈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 솔직히 기가 빨렸다. 막 새로운 인간관계를 시작해 신난 사람들 속에서,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다. 내가 자리하지 않았던 이야기에 낄 타이밍이 생기지 않아 단톡방을 나와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A 엄마가 “OO 엄마는 언제 점심 가능하세요? 시간 맞출게요.” 그 용기가, 그 배려가, 그 만남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아이를 키우면서 삶은 끊임없는 연대의 연속임을 깨닫는다. 육아에서도 다른 인간관계와 마찬가지로, 긍정적인 연대는 유대감을 통해 소속감과 힘을 주고, 부정적인 연대는 많은 에너지를 소모시켜 지치게 만든다. 어디서든 너무 많은 에너지를 빼앗기는 관계는 결국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내 주변에도 긍정적으로 발전한 연대, 적극적으로 소멸한 연대, 그리고 소극적으로 사라진 연대가 공존했다. 돌이켜보면 나에게도 물음표인 관계가 있었지만, 소중한 것에 더 에너지를 쏟는 성격 덕분에 그 물음표를 오래 두지 않았다.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그렇듯, 처음부터 친해지는 경우도 있고, 시간이 지나서야 가까워지는 경우도 있고, 그 시간이 오기 전에 기회를 놓치는 경우도 있다. 관계는 상호작용이라 어느 한 사람의 노력으로 단단해지지 않는다. 일방적인 관계는 지속될 수 없으며, 지금의 인간관계는 내가 만든 것이다. 우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단단히 이어왔을 뿐이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서로가 부러운 순간도, 부담스러운 순간도 있었을 것이고, 사소한 오해와 회복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다른 부분을 적대시하지 않고 보듬어 왔다.


영아기의 인간관계가 엄마의 성향과 상관이 있었다면, 유아기의 인간관계는 철저히 비슷한 육아 방식과 육아 가치관에 따라 발전했다. 아이의 자아가 발달하면서 아이들도 모임의 한 구성원으로 소통하기 시작했고. 우리의 육아 방식은 결이 비슷했다.


우리는 여전히 함께 박물관에 가고 공원에 간다. 계절마다 함께 물놀이를 가고, 캠핑도 간다. 자격증 시험을 함께 준비하고, 도움이 되는 책을 추천해 준다. 때론 발바닥이 아프도록 걷고 여행도 하며, 최근에는 열한 살이 된 기념으로 사진도 남겼다. 아플 땐 문고리에 조용히 죽을 걸어두고,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같이 울어준다. 지나 온 시절만큼 추억도 많이 쌓였다. 훗날 내가 내 아이를 기억하는 것만큼이나 서로가 서로를 기억할 것이다.


덕분에 아이의 유아기 육아가 외롭지 않았고, 지금도 외롭지 않다.


정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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