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인싸 아니면 뭐 어때

관계시리즈 3. 엄마사람의 사회적 거리 두기

by 수하

만 9살이 막 지났을 무렵이었다.


“안녕하세요, ○○엄마입니다. 생일 파티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이번 주 토요일, 학교 앞에서 만나기로 한 거 확인차 연락드렸어요. 아이들끼리 놀기에는 꽤 긴 시간이라 실례를 무릅쓰고 연락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제가 먼저 연락드렸어야 했는데, 생일 파티에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날은 제가 함께 있는 집에서 종일 놀 예정이니 걱정 마시고 보내주세요.”


사실 메시지를 보내기 전, 몇 번이나 문자를 쓰고, 또 지우기를 반복했다. 세상이 무서워지다 보니, 내가 별별 짓을 다 하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과잉보호가 화두가 된 시대지만, 뉴스에는 아이를 대상으로 한 범죄 이야기가 가득하고, 그 일은 꼭 남의 일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세상에 부딪히더라도, 되도록 안전하게 부딪히도록 도와주고 싶다. 생일파티 주인공인 아이는 평소에 반에서 친하게 지내는 친구라는 것은 알지만, 지금 당장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초대받은 주소뿐이었다. 다행히 아이 친구 엄마도 같은 부모의 입장에서 내 걱정을 이해해 주는 듯했다.


그렇게 우리는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훌륭히 메신저 역할을 해냈다.




아이는 대략 여섯 살 즈음부터, 스스로 인간관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단순히 친구와 사이좋게 노는 것을 넘어, 절친을 만들고 지속적으로 만나는 관계를 맺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자신의 성향과 취향에 맞는 친구를 스스로 선택하는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내 눈에 소위 '인싸'처럼 보이는 아이를 보며, 이제 관계를 맺는 것에 있어서 엄마의 간섭은 필요 없는 시기가 오고 있구나 느끼게 되었다.


어느 날엔 아이가 친구 엄마의 연락처가 적힌 쪽지를 내게 내밀었다. '○○엄마 연락처'라고 쓰인 종이에는 아이 친구가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은 듯한 번호가 귀엽게 담겨 있었다. 아직은 자기들끼리 만나는 것은 어려울 것 같으니, 엄마들이 대신 연락해 약속을 잡아달라는 뜻이었다. 이후로도 아이는 심심찮게 엄마들 연락처를 받아오고, 초대장을 받아왔다. 때론 그냥 넘기기도 하고, 여력이 되면 만날 기회를 갖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엄마들끼리의 소소한 관계로 발전한 경우도 있다. 내가 아이를 통해 인연을 만들어주었듯이, 나도 아이 덕분에 또 다른 인연을 만났다.




아이가 더 어렸을 때는, 같은 조리원 출신이거나, 같은 문화센터 수업을 듣거나, 같은 어린이집을 다니거나, 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공통점을 찾아 관계가 형성되곤 했다. 내가 처음 육아를 시작했을 당시엔 같은 시기에 같은 공간에서 비슷한 감정을 나눴다는 이유만으로도 유대감이 쉽게 생겼고, 인간관계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서는, 아이가 친한 친구의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내 관계를 확장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다. 이 시점이 바로 ‘엄마사람’의 적당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시작된 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경쟁률이 높았던 유치원에 운 좋게 당첨되어 3년을 다녔다. 산과 다수의 모래놀이 공간과 비닐하우스를 소유한 큰 유치원이었다. 나에게 큰 유치원이라는 것은,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 크다는 것을 뜻한다. 다섯 살이라는 다소 어린 나이에 시작한 생활이어서 엄마들의 개입이 잦았고, 자연스럽게 (반) 단톡방이 만들어졌다. 대여섯 명이 소소하게 만든 단톡방은 경험해 봤으나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엄마들이 모인 단톡방은 처음이었다. 각자의 닉네임은 아이이름이었다. 아이의 모습을 통해, 때로는 나의 모습을 대신 살아내는 듯한 시기였다.


그러나 머지않아 팬데믹이 시작되었고, 관계든 활동이든 자연스럽게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시간이 이어졌다. 팬데믹이 길어지면서 그 단톡방도 소멸했다. 어쩌면 코로나가 아니었더라면, 부지런한 누군가의 주도 아래 지금도 활발히 유지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후 2년 동안은 유치원 안에서 아이들끼리 조용히 관계를 맺는 시간이 되었고, 사회적 거리 두기와 맞물려 아이의 인간관계에도 독립이 시작된 듯했다. 코로나 덕분에, 나에게도 아이의 인간관계에 있어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 시기가 조금 일찍 찾아온 셈이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란 상태에서 관계에 무리하게 된다면, 뜻하지 않은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이 아직은 어리다 보니 아이를 초대할 때, 엄마들도 함께 초대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의 친구든, 엄마의 친구든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소속감을 느끼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런 마음으로 먼저 손을 내미는 일은 분명 용기 있는 행동이다. 하지만 무리한 관계는 크고 작은 마찰을 남기기도 함을 간과하면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커갈수록 서서히 관계 속에서 ‘무리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아이가 아무리 친구와 문제가 없다고 해도, 억지로 웃거나 내 가치관에 맞지 않는 대화를 이어가야 하는 자리는 피했다. 반대로, 내가 좋다고 해서 억지로 아이를 데리고 나가지도 않았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란 만큼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살아보니,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 진짜 관계였다. 적당한 거리는 삶에 여유를 주고, 과한 친밀감은 오히려 피로를 남긴다.


본래 나는 사람과의 관계를 귀찮아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안에서 에너지를 얻는 편이다. 내 취향에 맞는 인연을 만나는 건 언제나 반가운 일이었고, 아이를 통해 만나는 관계 안에서도 그런 만남은 행운이었다. 하지만 그 관계를 어떻게 이어갈지는 온전히 내 몫이다. 아이도 나도 때론 인싸가 아니어도 괜찮다.


지난 몇 차례 관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이제 곧 사춘기 자녀의 인간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써 내려갈 날도 머지않았구나 느낀다. 아마도 그땐, 내가 아는 것이 반, 모르는 것이 반이 되겠지.


그래도 그 고민, 누군가 나와 함께, 해 줄 거지?


keyword
이전 11화저녁에 수술하면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