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역력과의 전쟁
“조금 더 센 약으로 주실 수 있을까요.”
어릴 때부터 기관지가 약했던 나는 감기에 한 번 걸리면 꽤 오래 고생하곤 했다. 요즘의 나는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느껴지면 바로 병원으로 달려가 진료를 받고, 가능한 한 빨리 나을 수 있도록 센 약을 처방해 달라는 과한 말을 서슴지 않는다. 누가 보면 스스로를 참 아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내 의도는 따로 있다.
엄마사람은 함부로 아프면 안 되거든.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감기에 걸리면 걸렸나 보다, 기침이 오래가면 오래가나 보다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감기는 약을 먹으면 7일, 안 먹으면 일주일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몸이 힘들면 며칠쯤은 모든 걸 내려놓고 푹 쉬면 되지. 그런 여유가 있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된 이후로, 내가 아프다는 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 되어버렸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 아이에게 전염되면 안 된다. 내가 건강을 챙기는 이유는 단순히 내 몸을 위함이 아니며, 내 아픔이 아이에게 옮지 않도록 막기 위해서다. 같은 이유로 남편이 감기 기운만 보여도 우리는 재빨리 격리 조치를 한다. 아마 아이를 키우는 집이라면 누구든 공감할 것 같은 장면이다.
다른 이유로, 내가 아프면 가정의 리듬이 완전히 깨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신생아기나 유아기에는 내가 아프면 아픈 대로 아이를 돌봐야만 했는데,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정말 곤혹스러웠다. 지금은 아이가 조금 더 자라서 아빠와 시간을 보내는 데 익숙해졌지만, 더 어렸을 때는 나의 몫이 훨씬 더 컸다.
요즘은 코로나에 걸려도 특별한 약이 없다며 검사를 안 하기도 하지만, 나와 내 주변의 엄마사람과 아빠사람은 여전히 검사를 한다. 내가 코로나인지, 독감인지, 아니면 단순 감기인지 정확히 알아야 아이에게 전염될 병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고, 그에 맞는 대응도 가능하니까.
아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 나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유치원 등하원 시간에 맞춰 단축 근무를 하며 하루를 쪼개 쓰는 삶을 살았다. 다행히 돌봄의 공백은 없었지만, 내 시간은 분 단위도 아닌 초 단위로 움직였다. 지하철에서 내려 뛰어 유치원 셔틀과 동시에 도착해야 했던 그 자비 없던 시간들. 물론 내 욕심이라는 것은 알지만, 나는 오랜만의 안팎으로 지친 일상마저 즐거웠다. 그러나 육아와 오랜만의 사회생활이 겹치며, 내 몸의 면역력은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워킹맘으로 지낸 지 몇 달쯤 되었을 때의 어느 새벽, 몸에 이상한 느낌이 들어 불을 켜보니 온몸에 난생처음 보는 두드러기가 올라와 있었다. 별일 아니겠지 하고 출근 후 근처 피부과를 찾았다. 원인을 알 수 없으니 며칠 약을 먹어보라는 익숙한 처방을 받았고, 낮에는 가라앉다가도 밤이 되면 심해지고, 그렇게 며칠을 버텼다.
차츰 나아질 줄 알았지만 오히려 더 심해지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병원을 옮겨도, 약을 바꿔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며칠째 증상이 가라앉지 않자, 신경이 온통 피부에만 쏠렸다. 아이의 작은 접촉에도 몸이 움찔거렸고, 이대로 낫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부정적인 상상은 나래를 펼쳤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중 이상한 느낌에 거울을 보았는데, 두드러기가 귀까지 퍼져 있었다. 급히 남편에게 연락하고, 119를 불러 병원으로 향했다. 그것도 혼자. 그렇게 정확히 두 번째 응급실에 실려간 날, 나는 결국 응급실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 나에게 의사가 다가와 진료 예약을 도와주겠다고 했고, 다음 날 큰 병원에서 하루 종일 검사를 받았다. 세상이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 찬 나날들이었다.
결과는, 급격한 면역력 저하. 다행히 증상을 멈출 수 있는 약을 찾았고, 그 순간부터 고통은 서서히 물러났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이제 내가 아프면, 나 혼자만 아픈 게 아니라, 내 아이가, 우리 가족이 모두 멈춘다는 사실을. 그때부터 나는 내가 아픈 것이 불편함을 넘어 끔찍했다. 나는 다시는 같은 일을 겪고 싶지 않아서 내 건강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게 되었고, 아이의 건강함과 더불어 워킹맘의 길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유아기를 지나며 가장 힘든 것 중 하나는, 그 시기에 잔병치레가 잦다는 것이다. 나는 엄마가 되고 나서야 이렇게 많은 전염병이 있는 줄 알았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이제는 내가 어릴 때는 없었던 병들도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폐렴’이라는 것은 듣기만 해도 무서운 큰 병인줄 알았는데(무서운 큰 병은 맞지만), 엄마가 되고 나서야 폐렴은 어린이들 사이에서는 감기처럼 흔하게 오간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내 아이도 몇 번 밤을 지새우게 하긴 했지만, 비교적 잔병치레 없이 잘 자라주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잘 먹고 잘 자면 아플 일도 줄어든다. 엄마로서 아이의 면역력을 챙기는 건 기본이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수면’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아이가 충분히 잘 수 있도록 어찌 보면 강박적으로 신경을 썼고, 햇볕을 쬐며 바깥에서 실컷 뛰노는 것도 늘 우선순위에 두었다. 다행히 예민하지 않은 아이는 이런 흐름에 잘 따라주었고, 나는 워킹맘으로서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뒤흔든 위기의 순간이 찾아왔다. 바로 코로나였다.
코로나 유행 당시,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누구나 한 번쯤 시뮬레이션을 했을 것이다. 내가 먼저 걸리는 경우, 아이가 먼저 걸리는 경우, 남편이 걸리는 경우(이 경우는 비교적 간단하다. 그냥 격리시키면 된다). 팬데믹 초기에는 격리 기준도, 대응 방식도 수시로 바뀌었기에 가능성 있는 모든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야 했다.
그리고 결국 아이가 코로나에 걸렸다. 시뮬레이션이고 뭐고, 밤새 땀을 닦고 아이 곁을 지키다 보니 사흘째 되는 날, 나도 결국 감염되고 말았다. 아이가 회복하기 시작했을 때, 내가 아프기 시작했지만 나로 인해 아이가 전염될 걱정은 안 해도 돼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때 엄마로서 처음 마주한 감정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건강하면 오만 가지 근심이 있지만, 건강하지 않으면 단 하나의 근심만 있다.’는 말이 있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라는 말은, 엄마가 되고 나서야 마음 깊이 실감하는 진심이다. 자주 잊고 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내 아이에게 바라는 단 하나의 소망이다.
그리고 그만큼 바라는 다른 하나,
나는 정말 아프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