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집 가족계획
나와 비슷한 연령대이거나 조금 더 어리고, 결혼 후 한국에서 살고 있다면, 이 중 한 가지는 반드시 들어봤을 것이다.
(아이가 없는 사람에게) “자식은 하나 있어야지.”
(아들 하나 있는 엄마에게) “엄마한테 딸은 꼭 하나 있어야지.”
(딸 하나 있는 엄마에게) “아들 하나 있어야 든든하지.”
(성별이 뭐든 아이가 하나뿐인 엄마에게) “하나는 너무 외롭지, 둘은 있어야지.”
(아들 둘인 엄마에게) “그래도 딸은 하나 있어야지.”
(딸 둘인 엄마에게) “아들 하나는 낳아야지.”
(성별이 다른 자녀 둘인 엄마에게) “형제는 있어야지.” 또는 “자매는 있어야지.”
(아들 셋인 엄마에게) “그래도 딸은 하나 있어야지.”
(딸 셋인 엄마에게) “아들은 하나 있어야지.”
(무한 반복)
타인의 가족계획에 이토록 적극적인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가끔 들르는 맘카페에는 이런 질문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둘째 낳을까요, 말까요?"
"외동 확정이신 분 계신가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아랫집 할머니가 내 가족계획에 슬쩍 참견만 해도 ‘너나 잘하세요’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르면서도, 아이가 잠든 밤이면 고민을 토로하기 시작한다. 간섭받기는 싫지만, 어쩐지 혼자 고민하는 건 외롭다.
사실 정답이 없는 질문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각자의 배경이 모두 다르기에, 누군가 해주는 조언은 그저 조언일 뿐이다. 불안을 잠시 달래기 위해, 누군가의 이야기를 그냥 듣는 것이다.
셋째나 넷째를 고민하는 사람들의 질문의 답은 오히려 단순하다. 하지만 ‘하나냐, 둘이냐’의 문제 앞에서는 댓글 창이 전투태세로 변한다. 가지 않은 길을 잘했다고 위안하는 ‘자화자찬형’, 가고 싶었지만 가지 못해 아쉬워하는 ‘그리움형’
나는 나름의 최선의 선택을 했다는 '수긍형' 이거나, '현실주의적 낙관론자'에 가깝다. 내가 가지 않은 길에 미련을 두지 않으려 하고, 그 시절 치열했을 나의 고민과 선택을 존중하며 현재를 즐기려는 편이다.
다시 한번, 가족계획만큼은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문제다.
아이는 올해 열한 살이다. 터울로 보면 사실상 외동 확정이다. 유아기 때 둘째를 소극적으로 고민한 적은 있었지만, 여섯 살이 되던 해 여러 이유로 고민을 멈췄다. 그야말로 ‘복합적인 이유’였다. 물론 그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가 있긴 하지만, 단 하나로 설명되진 않는다.
아이는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에서 충만한 행복을 주었고,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었다. 그래서 잠시, 둘을 낳으면 행복이 두 배, 아니 그 이상의 배수가 될 것만 같다고 상상한 적도 있다.
그러나 아이를 ‘보는 것’과 ‘키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들 한다. 신생아기와 유아기 때 그 마을은 곧 ‘엄마’이고, 한국 사회는 그 엄마에게 그다지 관대하지 않다.
남편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지만, 최종 선택은 내 몫이었다. 아마도 그 역시 한국 사회에서 육아로 인한 삶의 변화가 남자보다 여자에게 훨씬 크다는 것을 절감했을 것이다.
결국, 믿을 만한 조부모의 도움 없이 커리어를 이어가고 싶은 소시민에게 선택지는 좁았다.
엄마가 되어 눈을 뜨고 관심을 갖게 된 부분도 있다. 알면 알수록, 우리 아이가 살아갈 미래는 결코 밝지 않게만 느껴진다. 인구감소를 넘어 인구절벽의 위기, 그보다 더 한 위기에 처해있는 환경, 그리고 내가 가장 두려운 정서적 환경 악화.
내 주변만 봐도 이미 변화는 뚜렷하다. 우리 동네 큰 유치원 세 곳 중 두 곳이 문을 닫았다. 내 아이는 젊은 사람이 없는 나라에서 ‘젊은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고, 또 다른 어떤 전염병을 피해 다녀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그중 가장 무서운 것은 인간의 정서적 불안이다. 사회는 점점 각박해지고, 사람답게 살아남는 일은 점점 지난하다.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온전하지 못할 것만 같아 출산을 꺼리는데, 출산을 꺼려서 세상이 온전해지지 못하는 고약한 굴레에 갇혀 있는 것만 같다.
어쩐지 십여 년 전의 나를 보는 듯한 지인이 있다. 일을 좋아하고 결혼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지인이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던 그녀는 이제 출산과 육아라는 다음 스텝 앞에 서 있다. 남편도, 본인도 일이 좋고 지금의 여유가 좋다. 그리고 ‘육아를 완벽하게 해내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모든 부분에서 다 만족스러운 사람은 없다. 연봉이 높다거나 만족스러운 커리어를 유지하면서도 아이와의 추억까지 풍성한 사람은 없고, 아이와 하루 종일 붙어 지내면서도 항시 자존감을 잃지 않는 사람도 드물다. 그만큼 다 만족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사회가 조금만 더 협조해 준다면, 다 가질 수는 없어도 ‘다 가져보려는 노력’ 정도는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긴 한데.
도움이 될지 모르는 조언을 했다. 육아는 고귀하고 행복하지만, 그만큼 희생도 따른다. 당연히 완벽하게 해낼 수는 없다. 아니, 어떤 부분에서는 반드시 무너지고 잃기도 한다. 그렇지만, 내가 세상에서 가장 충만한 행복을 느낀 순간은 ‘엄마가 된 순간’이었다고. 그러다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한 마디는
"그래도, 자식은 하나 있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