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시선으로 보는 거대한 모순

나방이 된 소녀들: 에쉬 메이페어의『세 번째 부인』에 대한 시선

by 초저녁
af3b091683ba42b18986bc4106b223681573632688905.jpg?type=w800 에쉬 메이페어 『세 번째 부인』(2018) 한국판 포스터


열네 살 소녀가 누군가의 부인이 되었다. 소녀의 남편 되는 자는 족히 서른 살은 많은, 그야말로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다. 지금이야 어린아이를 두고 무슨 짓이냐며 경악할 일이지만, 19세기 베트남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집안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평생을 바치는 것. 남편을 잘 모시고 집안을 정성스럽게 챙기는 것. 베트남의 소녀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의무'였다.


가부장제 아래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던 시기가 있었다. 놀랍게도 그리 오래 전이 아니다. 첩을 두는 것이 금지된 20세기 한국에서도 암암리에 둘째 부인을 들인 집안이 존재하고, 한 명의 남편과 여러 명의 아내, 그들 사이의 자식들이 사는 하나의 거대한 왕국 같은 집안을 다룬 영화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20세기 초 중국을 배경으로 한 장예모 감독의 영화『홍등』과 『붉은 수수밭』에서도 가부장제 아래 무너지는 여성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준다.『세 번째 부인』은 앞선 영화의 주인공보다도 훨씬 어린, 지극히 평범한 한 소녀의 시선을 통해 집안 내 거대한 모순을 담아낸다.


주인공 머이는 가난한 집안의 딸로 누에를 치는 갑부의 세 번째 부인이 되었다. 결혼 첫날부터 어린 머이는 '인간'이 아닌 남편을 봉양하고 집안의 대를 이을 아들을 낳을 '소유물' 취급을 당한다. 미성년자와 성인의 관계, 처녀임을 증명하기 위해 첫째 부인에게 '처녀혈' 검사를 받아야 하는 낡은 관습. 머이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그녀의 존엄을 짓밟는다. 슬프게도, 머이는 이를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다른 부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들을 낳기 위해서 힘쓴다. 마치 송아지를 낳는 소처럼, 자신의 삶의 유일한 목표가 대를 잇는 것인 양. 가부장제 아래 여성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서로가 서로의 적이 되곤 한다. 가부장제와 동반되는 일부다처제는 남성 아래 여성, 여성 사이에 권력구조를 공고히 하는데 일조한다. 같이 힘을 합쳐 자주적인 삶을 살 수는 없는 걸까? 그랬다면 좀 더 자유로운 삶을 살았을 텐데.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가부장제에 반항하는 것이 생존과 직결되었던 당시 여성들에게 자유란 곧 죽음을 뜻한다.


여성이 스스로 경제활동을 하기 힘들었던 당시 사회 분위기를 생각하면 누군가의 부인으로 살아가길 포기한 여성들의 삶이 얼마나 가시밭길이었을까 어림짐작 해볼 수 있다. 가마를 포기하고 스스로 집안에 걸어 들어갈 만큼 당찬『홍등』의 주인공 송련도 집안에서 아들을 낳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고 서서히 굴복한다. 아들을 낳은 여성, 남편이 사랑하는 여성에게 주어지는 달콤한 권력은 다른 집안의 여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새장 속 새가 되기를 바라게 만든다. 새장 속에서 노래하는 새의 삶은 어쩌면 야생에서 먹이를 사냥하며 사는 것보다 낫다고 믿는 것이다. 남편에게 잘 보이려 어설픈 방중술을 시도하는 머이의 모습이 사자 앞에 먹잇감의 마지막 발악처럼 안쓰럽게만 느껴졌다. 겨우 열네 살이다.



머이는 첫째 부인의 견제에 힘든 시간을 보낸다. 임신을 하자, 비슷한 시기에 태기를 보이는 첫째 부인의 아이가 딸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머이는, 아이를 낳은 것만이 자신의 가치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집안의 여종이 사내종과 정을 나눴다는 이유로 혼자만 쫓겨날 때, 둘째 부인 쑤안이 첫째 부인의 아들 선과 간통하는 것을 보았을 때, 누에가 오로지 실을 뽑기 위해 번데기가 되고 그대로 죽임을 당할 때. 모든 순간에 머이는 기시감을 느낀다. 이 상황이 불합리하다고, 정말 이런 삶을 사는 것이 맞냐고. 영화 중간중간 일련의 사건을 바라보는 머이의 표정은 마치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거대한 모순을 모른 척하고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혼란일 수도.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쑤안을 바라보는 머이의 혼란스러운 감정이다. 둘째 부인 쑤안은 머이보다 약간 나이가 많은 언니 같은 존재로, 첫째 부인처럼 견제하지도, 남편처럼 하대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녀를 딸처럼 돌봐준다. 머이는 그런 쑤안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게 된다. 사춘기의 소녀가 성과 사랑에 눈을 뜨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삭막한 집안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따뜻하게 대했던 사람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영화가 단순한 가부장제 고발물이 아닌 이유는, 머이를 단순한 피해자가 아닌, 감정과 욕망을 지닌 ‘평범한 소녀’로 그려낸 데 있다. 소녀가 당연히 느낄 감정을 통해, 이 사회가 얼마나 여성의 주체성과 감정을 억압해 왔는지를 드러낸다. 쑤안은 자신과 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사랑한 두 사람의 마음을 모두 밀어내지만, 그 모습은 여성 역시 누구를 사랑할지 선택할 수 있는 존재임을, 남편만을 사랑하는 순종적인 부인상이 얼마나 허상인지를 말해준다.




머이는 딸을 낳는다. 자신을 꼭 닮은, 귀엽고 동글동글한 아이를. 그러나 머이가 새 생명을 품에 안는 순간, 집안의 또 다른 생명은 꺼져간다. 첫째 부인의 아들 선이 원하지 않는 결혼을 거부했고, 그 어린 신부는 자살을 택한 것이다. 머이보다도 어린 그 소녀는 집안으로부터도, 남편으로부터도 철저히 외면당한다. 남편을 선택할 권리가 그녀에게 없었음에도, 누구 하나 그것이 소녀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시종일관 긴장하며 눈물을 흘리던 그녀는 죽어서야 비로소 편안한 미소를 짓는다. 죽은 얼굴 위에 앉은 나방은, 마치 숨이 다해야만 자유로워지는 여성의 운명을 비웃기라도 하듯 가볍게 날아간다.


머이가 간절히 바라던 ‘아들’이 아닌, ‘딸’. 머이는 이미 짐작했을 것이다. 이 아이 또한 자신처럼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가, 평생을 새장 속에서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이를 낳은 머이의 얼굴엔 기쁨도, 후련함도 없다. 오직 자신의 운명을 물려주었다는 죄책감만이 어른거릴 뿐이다. 독이 있는 풀을 들고, 머이는 한참이나 고민한다. 이런 삶을 살아가게 하느니 차라리 지금 끝내는 것이 낫지 않을까? 죽음만이 여성에게 주어진 유일한 자유는 아닐까? 갓 태어난 딸의 숨을 스스로 거두고자 하는 어린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어쩌면 머이는 아주 오래전, 스스로 이 집안에 굴복했던 그날을 후회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영화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머이의 갓 태어난 딸, 그리고 쑤안의 둘째 딸 냔이 그 증거다. 영화 내내 "남자가 되고 싶다"라고 노래하던 냔은, 여성성을 상징하는 긴 머리카락을 스스로 잘라낸다. 머이 역시 딸과 함께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누에가 아닌 나방이 되기를 택한 이 여성들의 삶은, 분명 이전과는 다를 것이다. 남성이 주는 먹이를 거부하고 스스로 날아오를 준비를 마친 머이와 냔. 그들에게 주어질 새로운 운명을 조용히 기도해 본다.


그녀들의 앞길이 너무 험난하지 않기를. 남자가 되기를 꿈꾸기보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여정을 선택하길. 그리고 가부장제 아래에서 으스러져간 수많은 운명들에게도 기도한다. 그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었다고.





에디터 초저녁의 한줄평

나방이 되기로 선택한 자들의 용기에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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