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우리를 인정하지 않더라도, 그저 살아가는 것

아파트의 저주: 강유가람의『럭키, 아파트』에 대한 시선

by 초저녁
tCPhPFk9aj1LZPjHZqyz8bAqQ1hcLZM8sKkppMY1xVmm7RjH9bTotNuFJb-ouqabGyx8_OjMpw3nevjgh9NV2g.webp 강유가람『럭키, 아파트』(2024) 포스터


어느 날, 아랫집에서 이상한 냄새가 풍겨온다. 처음에는 은근히 거슬리다가, 이내 그 냄새는 선우의 삶 전반에 스며든다. 처음엔 그저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는 이웃의 민폐 정도로 여길 수 있었다. 선우의 애인이자 동거인인 희서는 잠시 불편할 수는 있어도 넘길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아파트 배관을 타고 올라오는 악취는 단지 보이지 않는 '냄새'에 불과한 걸까?


럭키 아파트에 새로 입주한 선우와 희서는 동성 커플이다. 독립영화에서 동성 커플은 익숙한 소재 중 하나다.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퀴어'로서 겪는 불안과 압박은, 영화 속 갈등을 풀어내기에 적합한 주제이자 중요한 창구다. 더불어 한국 사회의 또 다른 특징인 '아파트'는 벽과 바닥, 배관을 공유하는 주거 환경에서 피할 수 없는 이웃과의 문제, 소통의 부재, 그리고 '집값'에 얽힌 갈등을 자연스럽게 담아낼 수 있는 소재다. 김수진 감독의 <노이즈>(2025), 엄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 같은 상업영화에서도 아파트 주민들 사이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인간성의 붕괴와 파멸에 초점을 맞추곤 한다. 이들 작품은 공간이 인간성을 시험하는 무대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럭키, 아파트>는 아파트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소재로 삼되, 그 자체를 이야기의 중심으로 삼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는 강유가람 감독의 <이태원>이 보여주듯, 공간이 단순한 배경이 아닌, 인물의 삶을 구성하는 유기체임을 보여준다. 여성주의적 시선으로 공간 속 인물의 주체성을 천천히 포착해온 강유가람의 작업처럼, <럭키, 아파트>는 퀴어 커플의 일상을 둘러싼 공간적 억압을 드러내면서도, 이들 개인이 그 안에서 선택하는 태도에 주목한다. 어쩌면 제목에서 암시하듯, 익숙하게 흘러갈 수 있는 이야기는 예상 밖의 선택을 하는 주인공 선우를 통해 비틀린다.



선우는 악취에 대한 조사를 중단하라는 아파트 주민들의 압박과 애인 희서의 눈치를 의식한다. 그럼에도 그것을 단순한 '악취'로 치부하길 거부한다. 그 냄새 속에는 분명히 한 사람의 삶이 담겨있었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가족과 절연하고, 화분을 돌보는 소소한 일상에 기대어 외롭게 살아온 노인의 죽음이. 비록 영화 속에서 직접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지만 그 악취를 통해 서서히 드러난다.


선우 역시 퀴어로서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아왔다. 그를 탐탁지 않아 하는 오빠, 절연한 부모, 동성애자인 희서와 그의 연인을 인정하지 않는 희서의 어머니까지. 그의 일상 속에는 거부와 멸시, 혼란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무엇보다, 일상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애인 희서조차 자신의 존재를 밝히길 꺼려한다는 사실은 선우에게 가장 큰 슬픔이다. 선우 역을 맡은 손수현 배우는 영화 내내 초점이 흐릿한 공허한 눈빛과 건조한 말투로 일상을 견뎌낸다. 그 모습 속에서 우리는 선우가 매일같이 맞닥뜨리는 불안과 초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이웃 주민들의 차가운 시선은 사회가 퀴어에게 보내는 시선을 상징하고, 그 압박은 악취보다도 더 선우와 희서의 일상을 옥죈다.



그럼에도 영화는 말한다. 사람을 구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라고. 선우가 아랫집 '화분 할머니'의 죽음을 외면하지 못했던 이유는 단지 연민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미래와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선우는 이 사건을 통해 '조용히 살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범에 균열을 낸다. 그 변화의 순간을 통해,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인간성이 억압을 뛰어넘는 유일한 힘임을 나타낸다. 화분 할머니의 사진을 전하고, 주민들과 갈등을 겪는 과정에서 선우는 이웃 여중생에게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얻는다. 사진을 건네는 선우의 미소와, 그를 옹호하며 돌아서는 여중생의 얼굴에는 따뜻한 연대와 공감이 서려 있다. 이 장면은 퀴어의 삶이 단절되지 않고, 서로를 위로하고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어쩌면 같은 이유로 고통스럽기에, 그 고통을 나누지는 못해도 함께 위로할 수 있음을.


영화는 복도식 아파트의 배경을 잘 활용한다. 복도식 아파트는 노을이 지면 그림자가 드는데, 아파트 복도에 선우가 서 있을 때마다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리고 언제나 악취로 인한 불길한 사건들이 터진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화분 할머니의 유품을 묻기 위해 선우와 희서가 올라간 산에서 노을이 질 때는 밝고 따사로운 빛만이 두 사람을 비춘다. 유품을 묻고 짧게 기도를 하는 모습은 마치 말레의 <만종> 같기도 하다. 관이 없는 무덤 앞에 경건하게 기도하는 연인의 모습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넋을 위로하고, 또 어쩌면 망자가 겪었을 모든 고통을 이겨내고 살아가겠다며 다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선우와 희서는 여전히 같은 이유로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 사회는 냉담하고, 그들을 '불편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무슨 문제일까. 그들은 그저 존재하고, 살아가는 사람일 뿐이다. 서로의 고통을 완전히 나누지는 못하더라도, 아주 작은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함께 버텨낼 수 있다. 아주 사소한 순간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마음을 나눌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럭키'한 삶 아닐까. 사람은 누구나 노을빛 아래 빛나는 해바라기처럼, 태양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꿈꾼다. 선우와 희서도 언젠가 지난날의 사진을 함께 보며, 미소 지을 수 있는 평범한 연인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영화를 본 나 역시, 그런 순간을 함께할 누군가를 꿈꾸게 된다.




에디터 초저녁의 한줄평

우리는 어쩌면 같은 이유로 고통받고, 같은 이유로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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