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망과 뒤뜰 사이에서
회사를 그만두었을 뿐인데 위로가 쏟아졌다. 먹고살 궁리는 하고 있냐며 토닥토닥 이모티콘을 보낸 이도 있다. 결혼 축하 한마디도 안 해준 사람이 별 걱정을 다 한다 싶었다. 평소엔 연락 한 번 없다가 "이제 주부가 되었네요"라며 눈물 이모티콘을 함께 보낸 사람도 있다. 잠깐, 주부가 되면 울어야 하나? 주부가 그렇게 슬픈 타이틀이었나? SNS에 일일이 전시를 하지 않았을 뿐이지 난 나대로 바쁘게 잘 지내고 있는데. 내가 일을 하든 살림을 하든 뭔 상관이람.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내심 속이 뒤숭숭한 참이었다. 맞다. 안정적으로 먹고살 궁리도 해야 하고, 이러다 커리어가 끊길까 초조했던 것도 사실이다. 임신 때문이었다. 아이를 하루라도 빨리 갖고 싶은데 커리어를 생각하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한동안은 풀타임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밤이고 주말이고 온종일 휴대전화와 노트북을 들고 다니던 것에 질린 탓인지, 일하는 모드를 오프하고 싶을 때 언제든 스위치를 끌 수 있는 일만 띄엄띄엄하고 지냈다. 그러다가도 이제 슬 일자리를 구해야 하나 싶을 땐 임신 때문에 멈칫했다.
아닌 게 아니라, 결혼 1년 차 가임기 유부녀의 이직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투적으로 일자리를 알아본 것은 아니지만, 현실이 그러했다.
결혼을 앞둔 예전 직장 동료가 이직을 준비하던 중 입사하자마자 아이를 갖는 건 민폐 같다며 프리랜서로 지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육아 휴직을 끝내고 돌아와 "육아 때문에 회사에 너무 소홀한 것 같다"라는 이유로 권고사직당했다는 업계 동료도 있다. 그 동료는 일 하나는 똑소리 나게 하던 사람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아예 대놓고 "일자리 구하기 쉽지 않아. 차라리 아이 낳고 와서 새로 시작해"라는 조언을 해준 사람도 한 둘이 아니었다. 본인들도 겪은 일이라며,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이런 말들에 자꾸만 쪼그라들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엄마들끼리 모여 각자 전공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생각났다. 누구는 서울대 수학과를 나왔고, 누구는 공대를 졸업했지만 지금은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엄마가 되었다는 그 장면.
곧 엄마가 되기를 꿈꾸는 내가 커리어니 연봉이니 재고 따지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졌다. 대학 졸업장이 다 무슨 소용이며 일터에서 인정받던 과거가 다 무슨 소용인가. SNS에 회사를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하는 친구들 사진이 올라오는 날이면 이렇게 고요히 지내는 쪽으로 마음이 수렴하곤 했다.
생각해 보면 늘 그래 왔다. 더 넓은 세계를 꿈꾸는 야망과, 뒤뜰에서 조용히 지내고 싶은 소박함. 어떤 날은 야심이 우세했고, 어떤 날은 안락한 일상이 그리웠다. 지금의 내 고민도 결국엔 같은 문제다. 아직은 어느 쪽으로든 결정하고 싶지 않다. 적당한 나른함은 유지하면서도 늘 그래 왔듯 열심히 살고플 뿐이다. 담장 넘어 광활한 세상에서든 따뜻한 우리 집 뒤뜰에서든 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