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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환 May 21. 2019

나는 집에서 드럼을 친다 – 전자드럼 구매기 Ⅱ

남자라면 악기 하나 쯤은!

전자드럼을 사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면 여기로.



Roland TD-3의 첫 인상은

지금은 오래 되어 잘 기억나지 않지만 박스의 위압감부터 엄청났다. 내가 받아봤던 택배 박스 중에서 가장 커다란 놈이었다. 전체 무게도 20kg 가까이 되었으니. 택배 기사님께서 흥미로운 눈빛으로 이게 드럼이냐고 물어보셨을 때 ‘전자드럼’이라고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던 기억도 난다.   


조립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렸을 적에 미니카와 프라모델 로봇을 조립하며 쌓았던 내공이 이렇게 발휘된다. 다만 케이블 정리를 깔끔하게 하는 작업이 힘들었다. 모듈에 패드 하나씩 다 연결하고 AUX 아웃과 전원 케이블까지 하면 10개 가까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것쯤은 문제 되지 않는다. 나는 이제 집에서 드럼을 친다. 늘 새로워. 짜릿해. 드럼이 최고야!   



기본에 충실하라고.


Roland TD-3는

화려하고 빼어나진 않아도 기본기가 충실한 녀석이다. 따라서 나 같은 초급자에게는 물론이고 어느 정도 연주를 잘 하는 사람들도 무난히 쓸 수 있는 그런 전자드럼이다. 스탠다드한 세팅에 맞춰진 안정적인 모습. 지금은 단종되어 버렸고 이제 그 비슷한 포지션을 TD-11K라는 모델이 대체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한 가지 눈에 띈다. 패드가 모두 다 검은색 고무로 만들어져 있는 와중에 가운데 있는 것 하나만 하얗다.   

팡팡팡- 탱탱하고 차진 손맛

그 정체는 바로 메쉬 재질의 헤드가 들어있는 스네어다. ‘쿵짝쿵짝’하는 리듬 소리에서 ‘짝’을 담당하는 바로 이 스네어. 스네어는 드럼 사운드의 전체적인 톤을 결정한다. 비중이 가장 큰 녀석이다. 메쉬는 질기고 강한 재질의 패브릭이다.   


고무와 메쉬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

거무죽죽하고 딱딱한 고무 패드와는 달리 때렸을 때 덜 시끄럽고 실제 드럼의 타격감과도 비슷하다. 게다가 테두리를 때리면 경쾌한 ‘딱’ 소리가 나는 림샷 플레이도 할 수 있다. 연습의 질을 한층 높여주는 메쉬는 진리. 다른 탐탐들도 전부 메쉬로 바꾸고 싶은 충동이 일지만 그건 차근차근 생각해보자.   


컴퓨터로 치면 CPU

메쉬 헤드가 전자드럼의 튼튼한 근육이라면 모듈은 두뇌다. 이 모듈 안에 얼마나 많은 샘플 사운드가 들어있고 어떤 기능을 갖고 있는지에 따라 가격이 또 천차만별이다. 사실 내가 원하는 건 그리 거창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드럼 소리를 마음껏 고를 수 있으면 그걸로 만족했다. TD-3의 모듈에는 나 같은 초보에게 차고 넘치는 기능이 들어있다. 총 32가지의 사운드 키트에 메트로놈, 타격 감도 설정, 공간감 설정, 코치 모드, 미디 연결 등. 인터페이스가 좀 어려워서 그렇지 기능은 나에게 과분할 정도였다.

MP3 플레이어를 모듈에 꽂아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재생시키고 헤드폰을 꽂아 나 홀로 들으면서 전자드럼을 연주한다. 앰비언스(공간감) 효과를 켜주면 드럼 사운드가 뻐엉- 콰앙- 더 풍부하고 생생해진다. 콘서트장에서 연주하는 듯한 느낌도 들고 치다가 조금 틀려도 티가 잘 안 난다. 자아도취에 쩔어 있기에도 참 좋다. Metallica의 Enter Sandman을 따라 치고 있을 때 나는 라스 울리히가 되고, Radiohead의 Creep을 연주하면 필 셀웨이가 되며, X Japan의 Week End를 따라 하는 순간은 요시키가 된다.

간혹 내가 연주하는 사운드를 녹음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를 위해서는 미디 인터페이스나 미디 케이블과 시퀀싱 프로그램 등이 추가로 필요하기 때문에 아쉽게도 그 꿈은 살짝 접어야 했다. 그래도 행복하다. 나만이 들을 수 있는 드럼 연주라서.   


하이햇 심벌의 열림 정도를 조절하는 페달, 그리고 실제 베이스 드럼과 흡사한 베이스 페달까지. 이 정도 구성이라면 드럼으로 낼 수 있는 기본적인 사운드는 거의 갖췄다고 볼 수 있다.   



전자드럼 10년, 그 후


전자드럼을 들이고 난 후

10년이 지났다. 유명한 록 음악 카피 연주도 얼추 가능해지면서 건조했던 내 삶은 조금씩 많은 부분이 변했다. 하나 하나 소개해보겠다.   


자기 소개 시 당당해짐

취미가 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드럼’이라 말하는 순간 나를 보는 동공이 커진다. 음악에 일가견이 있든 없든 이건 100%다. 대단한 화제 거리가 된다. 게다가 집에 전자드럼을 갖고 있다고 말하면 그 커다래진 동공이 더 확대되는 걸 볼 수 있다. 독특한 취미를 가진 사람, 음악에 왠지 조예가 깊어 보이는 이미지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가능하며 이는 연습량과 연주 실력과는 별개로 외부에 무척 흥미롭게 보여진다. 그 후로 지금까지 자기 소개를 할 때 전자드럼은 언제나 나만의 유니크한 매력을 어필하는 포인트다.   


아랫집 이웃과 첫 인사

전자드럼을 작은 방에 설치하고 신나게 연주한 다음날. 아랫집 이웃이 우리 집에 처음 방문했다.

“저기 어제부터 너무 시끄러우셔서요. 어린 애가 있는 집은 아닌 것 같았는데 갑자기 왜 그렇게 쿵쿵 울리는지, 무슨 일인지 궁금해서요.”
“아 네. 죄송합니다. 전자드럼을 샀는데 그 소리인 것 같네요.”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칠 때 분명히 소리가 크지는 않았는데. 기껏해야 도로독독 토로독독 고무 때리는 소리밖에 안 들렸을 텐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부모님께 드럼을 마구 쳐주시길 부탁드리고 아랫집에 양해를 구해 방문해서 어떤 소리가 나는지 내가 직접 들어봤다. 오 마이 갓. 때리는 소리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천장과 벽을 쿵쾅쿵쾅 울린다. 내 연주에 흘러 넘치는 열정이 진동으로 변해 본의 아니게 이웃에게 피해를 주고 말았다.

당장 베란다로 전자드럼을 옮겼다. 그리고 바닥에는 두꺼운 이불을 깔고 그 위에 놀이방에서 사용하는 매트도 한 겹 더 깔았다. 그 뒤로 아랫집 이웃이 직접 방문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 엘리베이터에서 그 분을 마주쳤을 때 아침과 저녁에는 연주를 자제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나의 예술혼 발휘 시간은 주말 오후로 완전히 결정되었다. 최악의 경우 살인 사건도 발생할 수 있는 층간 소음 문제. 내 취미도 취미지만 이웃을 먼저 배려해야 한다는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건 그렇고 내 언젠가는 지하실이 있는 단독 주택으로 이사를 꼭 가고야 말리라.   


직장인 밴드 가입과 클럽 공연

홀로 연습하기를 수 개월. 이제는 누군가와 함께 연주를 하고 싶었다. 함께 이뤄나가는 밴드 음악의 묘미에 목이 말랐다. 그렇게 나는 인터넷으로 찾은 어느 직장인 밴드에 가입을 했다. 그건 내 인생 최고의 도전이었다. 일생 일대의 혁명이기도 했다. 대학 시절에 조별 발표 과제 계획이 들어있는 수업은 쳐다보지도 않았을 정도로 무척이나 낯을 가리고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 자체를 꺼리는 나였기 때문에. 그저 음악을 좋아해 합주를 해보고 싶다는 일념이 만들어낸 기적 같은 일이었다.

구성원들은 이미 수 년째 취미로 기타와 노래를 즐기던, 나보다 연배 높은 사람들이었다. 처음엔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합을 맞추며 차츰 적응했다. 소개에 소개를 이어 더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연주 실력도 나름대로 꽤 발전했다. 그 후로 1년에 한 번 이상 클럽 공연을 개최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낮에는 회사에서 조용히 일하고 밤에는 미친 듯이 록을 연주하는 야누스 같은 매력. 내가 생각해도 너무 멋있다. 훗. 이런 멋짐은 지금의 얼리어답터에서 미디어 콘텐츠를 만들 때도 십분 활용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   



함부로 휴대하지 말지어다

언젠가 우리 밴드는 외부 공연을 나갈 일이 있었다. 지인 결혼식 축가였다. 야심 차게 선곡을 하고 연습을 했는데, 결혼식장에 드럼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나의 전자드럼을 갖고 가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은 조립과 분해와 휴대를 너무도 쉽게 생각했던 나의 불찰이었다. 케이블과 나사로 이리저리 묶여있는 파츠를 하나 하나 분리하는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20kg에 육박하는 무게와 정리 안 되는 부피의 이 괴물을 차에 싣는 것도 내리는 것도 고역이었다. 다시 조립할 때쯤에는 이미 힘이 반 이상 소진된 상태. 또한 미끄러운 결혼식장 바닥에서 드럼을 연주하고 있으니 치면 칠수록 내 몸에서 드럼이 저 멀리 멀어져 갔고 나의 정신도 함께 멀어져 갔다. 연주가 잘 될 리 만무. 다행히도 축가 타임은 무사히 끝냈지만 나의 생명은 그 몇 배로 줄어든 것 같았다. 마음의 눈물을 흘리며 앞으로는 전자드럼을 함부로 휴대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무대의 환경 파악과 신중한 언행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계기.   


참고로 요즘은 그나마 이렇게 소형화된 휴대용 전자드럼도 있다. 사진 속 모델은 Roland TD-4KP. 무게는 12kg이고 뼈대인 렉을 탁 접어서 가방에 넣을 수 있다. 연주하지 않을 때는 패드를 착착 겹쳐서 보관하면 공간 절약도 가능하다.   



영상 속의 주인공은 무려 어깨에 메고 다니며 자유로운 합주 라이프를 펼친다. 과연 어깨가 온전하게 남아있을지 의구심이 솟구치지만. 보다 보니 갖고 싶다.   



밴드 합주 사전 연습 시 유리함

이건 당연한 말이지만 연습할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드럼 포지션의 특성상 집에 전자드럼이 있다는 것은 굉장한 장점이다. 실제 연주 동선을 몸으로 몇 번 익히면 합주를 할 때 굉장한 효과를 발휘한다. 음악의 뼈대라 할 수 있는 리듬 파트의 튼튼함은 곧 수월한 합주 연습으로 이어지고 이는 팀워크 상승 → 자신감 향상 → 마음의 여유 → 성공적인 공연 → 커플 진입 확률 증가(?)라는 공식으로 귀결될 수 있다.   



지르면 일상이 변한다.
인생이 바뀔 수도 있다.


나는 평소에 지름신을 자주 영접하는 편은 아니지만 지름 행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적절한 지름은 일상을 풍요롭게 만든다. 혹은 아예 인생의 노선을 바꿔버릴 수도 있다.

나의 전자드럼 Roland TD-3은 내 인생에서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아이템이라 할 수 있다. 여러분의 인생 아이템은 무엇인가? 아직 없다면 지금부터 한 번 찾아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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