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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대장 Aug 09. 2022

언니의 장례식

2022년 8월

최 언니의 장례식장에 갔다. 돌아가셨다는 문자를 받았을 때, 나는 퇴근길 지하철을 타기 위해 역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몇 줄 안 되는 문자를 반복해서 읽었다.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슬픈 감정보다는 조금 멍했다.  한동안 그렇게 역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가만히 서있었다.

굉장히 슬플 거라 예상했지만 온통 슬프지만은 않았다.
 
8월 2일 빈소가 마련되었다고 다시 문자가 왔다. 조문 예절에 서툰 나는, 언니의 장례식에서 조차 허둥댔다. 영정사진 속 언니 모습을 바라봤을 때도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언니 동생분이 상주였고, 동생분과 마주 했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괜한 소리를 늘어놓다가 서둘러 인사를 끝내고 나왔다. 언니를 떠올리며 말을 했더니, 할수록 언니가 내가 사는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게 느껴져서 하마터면 상주 앞에서 눈물을 줄줄 쏟을 뻔했던 것이다. 나와서도 한동안 콧물과 눈물을 삼켰고 울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민망해했다.

언니는 나와 비슷한 사람이었다. 키가 나보다 아주 쪼금 컸지만 엊비슷했고, 대체로 말 수가 적었지만 친해지면 재밌는 어투로 말을 걸어오기도 했고, 먼저 안부를 물어봐주고, 상대를 챙기던 언니 었다. 생각이 많고 말 수가 적었고, 그래서 언니를 파악하기 전까지 속내를 다 알 수 없어 언니를 경계했던 적도 있었는데, 나와 비슷한 사람인 것을 알게 된 뒤로 나는 별소리를 다 한다 싶을 만큼 아무 말이나 할 수 있었다.

우리는 회사에서 처음 만났다. 그 사무실에서 업무 분야는 달랐지만, 생활을 같이하고, 같이 밥 먹고 , 같이 청소하고, 같이 술 마시고, 헌혈도 같이하고, 설악산에도 갔으며, 심지어 야구장에도 갔다. 야구에 관심도 없고  모르는 내가  언니를 따라서 사무실 사람들과 다 함께 야구장에도 가서 그 분위기를 즐겼고, 퇴근 후 다 같이 영화도 봤고, 다낭에도 같이 갔었고, 제주도에도 갔고, 남한산성에도 갔었고, 둘이서 따로 샤브샤브도 먹고, 그렇게 매일 아침 만나고, 얘기 나누던 사이었다.

그랬는데 어느 해 여름날, 언니가 갑자기 아팠다.

내가 생전 처음으로 헌혈을 시작하게 됐을 때, 언니를 따라나서서 함께 헌혈을 했었기 때문에 혈액암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이 날벼락같았고 그래서 더 슬펐다. 슬펐다는 말로 다 담지 못할 만큼 마음이 쓰렸다. 쓰린 나의 마음만큼 나는 반드시 언니의 건강이 좋아질 거라 믿었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죽지 않듯이 그런 일이 생길 거라 기대했다.

언니의 장례식장에 가는 동안 우리가 그동안 나눈 카톡을 읽었다. 내 잘못으로 카톡 대화를 한 번 날려버려서 대화는 길지 않았다. 상태가 굉장히 안 좋다고 들었던 한 달 전쯤 보낸 나의 메시지가 마지막이었다. 언니는 결국 읽지 못했다.

언니를 아끼고 좋아했던, 그때 같은 회사를 다녔지만 지금은 조금씩 다른 사정들이 있게 된 사무실 사람들은 언니의 장례식장에 모두 모였다. 코로나 유행 전에 마지막으로 만났었고, 다들 그만큼 오랜만이었다.

같이 밥 먹고, 같이 청소하고, 같이 다낭을 갔고, 설악산에 갔고, 제주도에 갔던 이들이 한 날 한 자리에 있게 됐다.

우리들은 슬픔과 반가움이 동시에 들어 한 명이 울면 따라 울다가 한 명이 웃으면 또 따라 웃었다.

장례식장에서 내어주는 육개장에 맥주를 마시며 생각에 빠져있을 때쯤, 실장님이 언니의 카톡에 우리 모두의 사진이 한 명도 빠짐없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언니의 프로필 사진 모음에는 내가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떠나간 이에게도 서운한 마음이 들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그걸 실장님께 말했다. 그랬더니 프로필 사진 모음이 아니라 배경화면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엄청나게 많은 사진이 있다고.

앉은자리에서 다 보고 싶었지만 몇 장만 보고 그만두었다. 혼자 있을 때 자세하게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던 지하철 안에서 볼 수 있었다.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인 우리들은 그 사무실에서 생활하던 때처럼 굴었다. 웃고 떠들고 울고 다시 또  떠들었다. 장례식장에 조문객이 밀려들어 우리는 근처 맥주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로의 근황을 묻고 답하기만 해도 반갑고 즐겁고 다시 슬펐다가 또 웃었다.

영종도까지 들어가는 길이 멀었던 나는 조금 일찍 일어섰다. 가는 길이 아쉬워 눈에 띄는 족족 그들의 손을 잡아보았다. 따뜻했다.

돌아가는 길목에 늦은 도착을 알려왔던 과장님을 만나러 갔다. 빈소 쪽에서 다행히 과장님을 만났고 만나자마자 반갑고 동시에 같이 슬펐다. 또 만나자고 약속하며 짧은 만남 후 헤어졌다.

지하철 역으로 들어가기 전에 말보로 라이트를 샀다. 오늘은 그래도 될 것 같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피우던 담배는 아니었지만 그냥 이게 생각이 났다. 오랜만인 것 치고는 아는 맛이었고, 손가락 동작, 들이마시는 호흡까지  매일 피워대던 인간처럼 익숙한 스스로에게 혐오가 밀려들 때쯤 언니가 떠올라 목이 메었다. 비가 너무 하다 싶게 많이 내린 날이었고, 비를 머금은 습한 공기를 따라 연기는 멀리 깊게 번져갔다.

지하철에서 2백 몇 개의 사진들을 넘기며 언니에 대해, 언니가 살아온 삶에 대해, 그리고 내 삶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동안 나는 사는 것에 대한 의미를 항상 생각해왔고, 찾기 위해 애써왔지만, 결국은 하나도 알아내지 못한 것 같았다.

언니에게는 친한 친구들이 있었고, 자주 웃었고, 귀여운 것을 좋아했고, 선물 받은 것을 귀중히 여겼으며, 언니는 엄마와 자주 여행을 다녔었다. 그리고 같이 회사 생활을 했던 우리가 자주 보였다. 내 사진도 있었다. 사진 속 언니의 모습은 건강했고 맑게 웃고 있었다. 나는 언니의 마지막 모습을 알지 못했다. 많이 아팠고 야위웠다는데 나는 그 모습을 알지 못했다.

아프기 전에 언니는 나에게 등산화를 선물해줬었다. 우리가 북한산을 같이 올라갔다 온 뒤였다.

언니는 내가 아무 운동화나 신고서 산을 오르던 게 안타까웠던 모양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선물에 나는 많이 기뻐했었다. 이 등산화를 신고 언니와 함께 산에 가자했었는데..

그 후로 언니에게 하는 인사에서 종종 기다린다는 표현을 하게 되었다. 언니 몸 상태가 좋아지면 예전처럼 산에는 못 가더라도 꼭 같이 걷자고 약속했었으니까.. 나는 언니한테 ( 언니의 건강이 좋아지기를, 같이 걷고, 같이 맛있는 거 먹고, 다시 만나기를 ) 기다리고 있다고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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