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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를 규명하는 역설법

드라마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by 소영

21세기 감정 자본주의의 한복판에서 '신뢰'는 단순한 인간관계의 기초를 넘어서 삶의 안전망이자 사회적 자산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의심에 익숙한 시대를 살아간다. 가족, 친구, 연인, 동료 등 가장 가까운 관계 속에서도 신뢰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유리탑처럼 위태롭다.




이러한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한 작품이 바로 MBC 드라마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2024)다. 이 드라마는 가족이라는 심리적 공간을 무대로 신뢰와 의심이 어떻게 얽히고 충돌하며 서로를 조건 짓는지 섬세하게 탐색한다. 이 글에서는 이 드라마가 탁월하게 활용하고 있는 공간 배경과 시각 연출을 중심으로, 아버지와 딸의 치열한 심리전을 리뷰해보려 한다.



태수의 시선과 의심의 윤리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태수(한석규 분)의 시선을 좇는다. 그가 보는 것을 보고, 그가 의심하는 대상을 함께 의심하게 되는 서술 방식은 시청자에게도 일종의 공모를 요구한다. 태수의 시점을 중심으로 조각조각 제시되는 사건들은 극의 흐름에 자연스러운 서스펜스를 부여하는데, 이런 방식은 단순히 정보를 제한하는 기능을 넘어 태수가 느끼는 불편한 감정에 윤리성을 부여하는 효과를 만들어 낸다. 즉, 시청자는 '딸을 의심하는 아버지'의 시선을 통해 그의 감정을 전이받거나 직접적으로 가담하게 된다.


누가 보더라도 불편한 두 부녀 사이의 심리전을 태수의 시선을 중심으로 보여주는 방식은 태수에 대한 노골적인 옹호임과 동시에 시청자로 하여금 제한된 정보 속에서 하빈(채원빈 분)을 판단하고 의심하도록 만드는 구조적 장치다. 드라마 초반, 살인 사건 현장에서 하빈의 것으로 추정되는 붉은 실을 발견한 태수는 하빈의 방문 앞으로 향한다. 그러나 차마 빈 방의 문을 열어 보지는 못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하빈이 설치해 둔 문틈의 종이 트랩이 눈에 띈다. 그리고 급격히 굳어지는 태수의 표정이 클로즈업되며 딸을 향한 오싹한 의심이 화면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 종이트랩은 그 자체로 대사를 대신하는 강렬한 기호가 되고, 이 장면은 내 딸이 사람을 죽였을지 모른다는 최악의 의심에 동의를 구하듯 제시된다. 이토록 수상한 딸을 어떻게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결국 문을 열고 들어가 딸의 방을 뒤지는 태수의 모습은 단순한 불신이 아니라, '믿고 싶기에 의심하는' 감정의 딜레마를 잘 보여준다.


극의 전반을 통해 태수가 하빈에 대한 신뢰와 의심을 반복해 나가는 이런 장면들은 이 드라마의 핵심 정서 그 자체다. 이처럼 드라마는 단순한 범죄 추적을 넘어서, 신뢰와 불신 사이를 오가는 인간 태수의 감정적 불안정을 주제로 끌어올린다.


타자화된 하빈


특히, 이 드라마에서 중요한 것은 의심이 낳은 파국이나 나비효과 같은 게 아니라 ‘의심하는 사람’인 태수가 믿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다. 하빈은 끊임없이 의심받는 와중에도 아빠에게 화를 내거나 해명을 시도하지 않는데, 대신에 이런 질문을 던진다. “내가 왜 그러는지 생각해 본 적 있어?” 하빈의 이 질문은 태수에게 있어 ‘믿음’의 방향을 바꾸는 전환점이 된다. 태수는 하빈을 이해하기 위해 딸을 향한 프로파일링을 시작한다.


이 드라마가 딸을 프로파일링 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시도하고 있는 것은 신뢰의 조건을 이해하기 위해 불신의 내부를 파헤치는 역설법이다. 즉, 태수가 딸 하빈을 믿는다는 것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스스로의 능동적인 선택이자 윤리적 결단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빈은 신뢰의 역설을 구체화하는 서사의 핵심 축이다. 하빈이라는 인물은 극 중 용의자도 흉기도 살해 동기도 짐작할 수 없는 ‘이수현 살인사건’ 만큼이나 미스터리한 존재다. 하빈은 극의 중심에 있으나 그 심리적 중심에는 위치하지 않는데, 그녀는 타인의 시선으로만 구성되며, 자신의 감정이나 내면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특히 어머니 윤지수(오연수 분)가 생전에 하빈에 대해 반복적으로 언급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평가는 하빈을 비정상적인 타자로 설정하는 장치가 된다. 이는 시청자에게 하빈을 사이코패스, 혹은 사회적 감정 결핍자로 의심하게 만드는 단초를 제공한다.


물론, 하빈은 실제로 동물이나 사람을 해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극 중 사건에서도 가해자나 피해자가 아닌 ‘목격자’의 위치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중간자의 위치는 오히려 그녀를 더욱 불편하고 의심스러운 존재로 만든다. ‘단순 목격자’라는 하빈의 증언을 태수는, 시청자는 신뢰할 수 있는가?


드라마는 이 물음에 대한 응답을 끝까지 유보하며 하빈에 대한 긴장을 유도하고, 이는 동시에 드라마 전반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핵심 동력으로 기능한다. 결국 이 드라마는 신뢰란 관계, 혈연 같은 명목적 조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감정의 노동과 해석의 과정을 전제로 할 때에만 성립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빈이라는 인물은 그 자체로 ‘신뢰의 조건’을 끊임없이 실험하는 장치로 이해할 수 있다.


집, 그 친밀하고 위태로운 공간


범죄/수사 장르를 표방함에도 사건 현장이나 경찰서보다 더 많이 등장하는 ‘집’은 이 드라마의 메인 무대이자, 가장 많은 모순과 불안을 품은 공간이다. 사건 현장을 뛰어다니는 태수가 귀가해서도 경험하는 긴장감이나, 밖에서도 안에서도 영민(김정진 분)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성희와 가출팸 아이들의 집, 집이라고 보기에는 열악한 정두철(유오성 분)의 쪽방까지.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에서 집은 가장 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으면서, 끊임없이 의심해야 하는 취조실이자, 잠재적 위협이 도사리는 심연과도 같은 장소로 그려진다.


특히나 가족은 둘 뿐인데도 불필요할 만큼 커다란 식탁, 방과 방 사이를 단절하는 긴 복도, 어두운 색감의 조명과 벽지, 네모 반듯한 구조물들로 가득한 태수의 집은 태수와 하빈 두 사람의 통제적인 성향뿐 아니라 둘 사이의 심리적 거리, 또는 감정적 고립을 잘 보여준다. 가족이란 이름 아래 진심이 숨겨지고, 서로의 의심을 의심하며, 대화 대신 침묵이 감도는 공간으로서의 '집'은 말 그대로 친밀한 배신자가 기생하기에 최적의 장소인 것이다.



복도


태수의 집에 배치된 긴 복도는 이 드라마에서 가장 직설적이면서도 상징적인 시각적 장치다. 이 좁고 어두운 복도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태수의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의심과 불안을 시각화하는 역할을 한다. 1화에서 자동차가 헤드라이트에 의존해 좁고 어두운 길을 나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드라마는 이후의 10화 동안에도 계속해서 어두운 복도, 산길, 골목길 같은 좁고 긴 공간 속에서 인물들을 헤매게 한다.


사건의 단서를 찾을 때는 어두운 산길을 헤매던 태수는, 하빈에 대한 단서를 찾을 때는 집의 불 꺼진 복도를 헤맨다. 이때 어두운 복도에서 인물을 뒤쫓거나, 복도 끝을 정면에서 비추는 앵글을 통해, 시청자는 태수의 불안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복도는 물리적으로는 직선이지만, 심리적으로는 혼란이 가득한 미로로 읽힌다.


5화에서 태수가 아내 지수가 생전에 남긴 정신과 상담 녹음을 들으며 복도를 걷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그는 음성 파일을 통해 아내의 진심, 곧 자신과 딸을 향한 마지막 감정의 파편을 따라간다. 하빈을 향한 아빠 태수의 의심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느끼고 있었기에, 자신만은 딸을 믿어주고 싶었던 마음과 그럴수록 더욱 딸을 믿지 못한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던 아내 지수의 복잡한 윤리적 갈등이 이어폰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 복도를 따라 도달한 곳은 오랫동안 닫혀 있었던 지수의 방이다. 태수는 그곳에서 끝내 무너져 오열한다. 항상 감정을 억누른 채 목적지도 없이 복도를 오가던 그가, 마침내 침묵해 온 진실 앞에서 무릎 꿇는 이 장면은,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내면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감정을 외부로 발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이제 복도는 더 이상 단순한 통로가 아니게 된다. 그것은 신뢰와 불신, 침묵과 고백, 애써 외면해 온 진심과 마주하는 감정의 통과의례로 기능한다. 그리고 그 끝에 자리한 지수의 방은 태수에게 있어 감정의 봉인이 해제되는 장소로 변화한다.



프레임


이 드라마에서 문, 창문, 프레임 등 사각형 구조물의 활용은 공간 연출의 핵심 전략이다. 특히 태수의 집은 문, 창문, 탁자, 벽과 바닥의 무늬까지... 신경 쓰일 만큼 사각형으로 가득하다. 이 사각형은 단순 미장센이 아니라 또 다른 쓸모 즉, 태수가 타인을 바라보는 방식을 시각화하는 역할을 한다. 드라마를 보다 보면 문과 창틀을 이용해 인물을 네모난 프레임 속에 가두는 연출이 매우 자주 등장한다. 카메라는 특히 태수를 자주 프레임 안에 가두는데, 주로 누군가를 의심하거나 관찰하는 장면에서는 문이나 창 너머를 통해 인물을 바라보는 구도가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언제나 문 틀 너머, 창틀 너머로 대상을 바라보는 이미지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사람인 프로파일러 장태수에 대한 메타포로도 읽힌다. 그렇다면 문 틀 너머 하빈을 바라보는 태수의 시선이 언제나 하빈의 등 뒤에 있거나 너무 멀리 있어 닿지 않는 장면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아내이자 엄마 지수의 말처럼 태수는 “범죄자 마음은 귀신같이 읽으면서 애 마음은 그렇게 모른”다.


그래서 태수는 하빈에 대해 고민할 때 종종 닫힌 문 앞에 서 있는다. 집 안에 있는 하빈의 모습이 아닌 대문과 방문을 오랫동안 비추는 풀숏은 프레임에 둘러싸인 태수만큼이나 자주 등장하는 숏이다. 극 중 하빈에 대한 의심이 깊어질 때마다 카메라는 그 너머에 있을 하빈을 보여주지 않고, 굳게 닫힌 문만을 멀리서 응시한다. 이런 숏을 통해 하빈은 태수에게뿐만 아니라 시청자에게도 ‘닫힌 문’ 너머에 있는 사람이 된다.


이것은 하빈과 태수의 관계를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하빈을 적극적으로 타자화하는 데도 이용된다. 하빈은 언제나 문과 벽 너머에 있는 사람으로 그려짐으로써 그녀의 표정, 행동 등은 직접적으로 보이지 않고 타인의 시선을 경유해서 이해되거나 상상 속에만 존재하게 된다. 결국 문은 통제의 기제이며, 동시에 거리의 상징인 것이다. 언제나 타인의 해석을 통해 존재하는 하빈은 가족 안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타자, 즉 가장 친밀하지만 가장 낯선 존재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6화에서 태수가 폐건물의 닫힌 문을 망설임 없이 열고 하빈에게 다가가는 장면은, 이 모든 ‘닫힌 프레임’을 넘어서는 극적인 순간이 된다. 이번에는 누가 봐도 하빈이 사람을 해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태수는 문을 넘어가 주저 없이 그녀의 공범자가 된다. 드라마 전체를 통해 반복되던 시각적 통제는 이 순간 완전히 해제된다.


태수는 문 안에 존재하고, 카메라 앵글은 사각형을 벗어나 흐트러지며, 창을 통해 들어온 붉은색과 푸른색의 경광등이 그들의 얼굴 위를 혼란스럽게 비춘다. 태수가 하빈에 대한 신뢰의 문턱을 넘는 상징적 장면이 되는 이 6화를 기점으로 태수를 둘러싸던 사각 프레임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신뢰’라는 추상적 감정을 시각적으로 어떻게 연출하고 구성할 수 있는지를 훌륭히 보여주고 있다. 서사적인 아쉬움이 곳곳에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시각적 연출은 이런 아쉬움을 상쇄할 만큼 강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인물의 불안과 고립, 의심과 전이를 장면과 구도 속에 풀어냄으로써, 이 드라마는 ‘신뢰’라는 감정을 하나의 공간적 체험으로 전환해 낸다. 태수가 하빈을 향해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누군가를 믿는다는 말에 얼마나 많은 윤리적 결단과 갈등이 스며있는지 체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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