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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문턱을 넘는 방법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리뷰(1)

by 소영

<미지의 서울>에서 정반대 성격의 쌍둥이 자매를 연기하며 1인 2역의 깊은 내공을 보여준 박보영. 이번 작품은 그의 연기력뿐 아니라,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위태로운 청춘의 단면을 따뜻하게 담아내며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낮은 자존감과 방황 속에 살아가는 미지, 성공했지만 여전히 불안한 미래, 그리고 친구들의 모습까지—그중 한 명쯤은 분명 내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이처럼 아프고 위태로운 청춘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위로를 건네는 드라마를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또 다른 작품이 있다. 바로 박보영의 전작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부상으로 육상을 포기하고 2년간 은둔한 미지의 모습은, 우울증을 겪고 정신병동에 입원한 간호사 정다은과 묘하게 겹친다.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이 드라마는 따뜻한 색감과 캐릭터 간의 유대, 박보영 특유의 긍정적 이미지 덕분에 ‘정신질환’이라는 주제를 대중에게 한층 부드럽게 전달한다. 특히 정신질환에 대한 은유와 고정관념을 허무는 데 집중한 점은, 이 드라마가 단순한 힐링물이 아닌 더 큰 가치를 지녔음을 보여준다.


오늘은 이 힐링물의 빛과 그림자를 함께 들여다보고자 한다. 특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서 가장 먼저 퇴장하면서도 가장 긴 여운을 남기는 인물, 서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글이 길어지는 관계로, 두 편에 걸쳐 나누어 소개한다.



평평한 정신병원


극 중 명신대학교병원 정신의학과 병동은 경사도, 문턱도 없는 평평한 곳으로 그려진다. 이건 마치 은유이자 선언으로 읽힌다. 병동은 이질적이고 위협적인 공간이 아니라, 누구나 잠시 머물 수 있는 회복의 장소로 그려진다. 그곳에서 정신질환자들은 더 이상 ‘이해 불가능한 타자’가 아닌 ‘나일 수도 있는 사람’이다. 병동의 문턱 없음은 곧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의 장벽을 낮추는 조건이 된다.


조금 더 이야기해보자면 정신병동의 ‘문턱 없음’은 캐릭터들 간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간호사와 환자, 의사와 보호자의 관계는 일방적인 권위와 통제가 아니라 공감과 친밀함을 기반으로 구성된다. 주인공 정다은 간호사(박보영 분)는 환자의 말에 귀 기울이며, 환자들 또한 그녀에게 개인적인 고민을 털어놓는다. 병원 안에서 위계는 희미해지고, 사람들 간의 감정적 접촉이 중심이 된다.



누구나 아플 수 있다.


그 상징적 인물이 바로 양극성 장애를 앓는 40대 여성 오리나(정운선 분)다. 다은이 담당하게 된 첫 환자 리나는 학벌, 직장, 외모, 배우자 등 모든 ‘스펙’을 갖췄지만, 그 이면에는 평생을 착한 딸로 살아오며 자신을 억압해 온 감정이 쌓여 있었다. ‘금수저’의 신세 좋은 한탄으로 밖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리나의 고통은 병동 안에서야 비로소 치료가 필요한 상처가 된다. 정신병원은 그녀에게 계급의 옷을 벗고 살아볼 수 있는 최초의 장소인 셈이다.


리나의 에피소드는 정신질환이 단지 약자나 실패한 사람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오히려 누구나 살아가며 겪을 수 있는 감정의 억압과 상처가 병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말해주는 서사다. 의사 황여환(장률 분)은 리나에게 “윈스턴 처칠도 양극성 장애를 앓았다”고 말한다.

뭔가를 넘치게 가졌다고 해서 정신병에 안 걸리나? 반대로 뭐가 부족하면 정신병에 걸리고?

즉, 병동은 인간의 정체성을 계급이나 사회적 성공 여부로부터 벗어나 ‘감정을 가진 존재’로 복원시키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반복된 취업 실패에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김서완, 직장 내 괴롭힘으로 사회공포증을 앓는 김성식, 보이스피싱으로 전재산 3천만 원을 잃은 정하람 등 병동에 입원한 다양한 환자들은 서로 다른 이유로 고통받지만, 병원복을 입고 규칙을 따르는 동안 그들의 차이는 무화된다. 병동 안에서는 성공한 사람도, 실패한 사람도, 청년도, 노년도 모두 같은 위치에서 자기 고통을 말한다.



여전히, 경계에 선 치유


고통은 공유 가능하고, 치유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듯 보인다. 바로 이 지점이 드라마의 감동 포인트이자, 동시에 치명적인 한계를 품고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병원 밖 사회에서의 계급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 병원의 모습은 사회심리학자 에바 일루즈가 지적하는 ‘고통의 민주주의’를 떠오르게 한다. 일루즈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감정적 고통이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보편적 정서로 소비되면서, 고통의 사회적 원인과 계급적 조건이 지워지는 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우울, 불안, 자존감 결핍은 이제 ‘모두의 감정’이 되었고, 이는 곧 치유와 회복을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자기계발적 명령으로 작동하게 된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역시 이 함정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드라마는 누구나 병들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지만, 그 병이 왜 발생했는지, “누군가는 왜 병원에 조차 오지 못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끝내 하지 않는다. 병동은 치유의 공간으로 그려지지만, 그곳에 도달하지 못한 이들, 회복의 언어조차 갖지 못한 사람들은 이 이야기에 없다.


회복의 가능성은 드라마의 중심 서사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회복되지 못한 이들의 현실은 보이지 않게 된다. 치유 서사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문턱은 높고 경사는 가파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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