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리뷰(2)
서완의 죽음이 남긴 것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대부분의 환자들이 ‘치유’라는 방향성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다. 다은은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며 간호사로서 자리를 잡고, 환자들도 각자의 고통을 직면하며 병원 밖의 사회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 안에서 단 한 명, 끝내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 인물이 있다. 바로 김서완이다.
서완은 명문대를 졸업하고도 수차례 취업에 실패한 공시생이다. 고시 낙방과 무기력 속에서 자신이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자각한 그는 점점 현실을 견디지 못하게 된다. 그런 서완이 유일하게 안정을 느끼는 곳은 현실이 아니라 판타지 게임 속 세계다. 그곳은 한 유저의 설명처럼 경험치만큼 레벨이 오르고, 스펙도, 시험도 필요 없는 곳. “뿌린 대로 거두는” 세계다. 이는 노력과 결과가 비례하지 않는 불합리한 현실 세계의 반대항이자, 그런 현실 세계에서 도망친 서완이 당도한 곳이다.
총 6화에 거쳐 망상장애가 완화되어 정신병동을 퇴원하게 된 서완은 다시 고시원으로 돌아간다. 아들을 아프게 만든 곳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고 싶지 않았던 부모님은 그를 만류하지만, 서완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다시 혼자만의 싸움을 시작한 서완은 결국 학원 옥상에서 몸을 던진다. 간호사 다은을 부를 때조차 ‘중재자’라는 게임 속 명칭을 사용하는 그는, 끝내 현실에서 해답을 찾지 못한 채 무대에서 내려온다.
서완의 죽음은 김성식, 송유찬 등 다른 인물들의 사연과 맞물리며 갈수록 심화되는 청년 실업 문제와 한국의 병리적인 기업 문화를 날카롭게 꼬집는다. 특히 서완의 경우로 보듯, 청년들에게 직업이란 생계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의 일원으로서 가치를 인정받는 인정투쟁의 문제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드라마는 이 비극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서완의 죽음은 곧바로 아내를 잃은 ‘자살 생존자’ 최준기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 연결은 자연스럽지만, 동시에 불편하다. 서완의 죽음은 사회 구조나 제도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되기보다는, 또 하나의 개인적인 상처로 치환된다. 즉, 그의 자살은 정신질환의 원인이자 결과가 되어, 치밀한 ‘치유 트랙’ 속에 영원히 봉인되는 것이다.
이제 이야기는 다은의 차례다. 서완을 떠나보낸 후, 다은이 겪는 무기력과 죄책감은 ‘우울증’이라는 병명으로 재구성된다. 그녀 역시 자살 충동을 경험할 만큼 깊은 어둠에 빠지지만, 다행히 병동에 입원하고 주변의 지지와 돌봄 속에서 다시 삶을 선택한다. 그렇게 다은의 고통은 ‘예방 가능한 자살’이 되고, 그녀의 회복을 통해 치유의 서사는 또 한 번 설득력을 얻는다.
자살이라는 병
이 구조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학업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 “우울증으로 인한 극단적 선택” 같은 뉴스 헤드라인처럼, 자살을 특정한 병리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이제 문제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런 식의 ‘자살의 합리적 이해’에 대한 집착은 때때로 고통의 맥락을 흐리게 만든다. 서완의 자살은 망상장애라는 진단명 아래 놓이고, 그 죽음에서 비롯된 다은의 고통은 또 다른 질병으로 전환된다.
이렇게 병리화된 설명은 자살자의 고통을 헤아리기보다는 그들을 타자화하는 전략으로 작동한다. 즉, 죽음은 구조적 맥락 속에서 발생한 결과가 아닌, ‘예방 실패’의 결과로 축약되고, 자살은 설명 가능한 범위 안에서만 이야기된다.
이런 방식은 위험하다. 치유 담론 안에서 자살자는 회복 서사의 흐름에 참여하지 못한 채, 말 없는 존재로 남는다. 실제로 그들의 죽음은 온전히 이해되기보다, 살아남은 자들의 성장과 성찰을 위한 장치로 소비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죽은 자를 기억하기보다, 살아남은 자를 안심시키는 서사를 택하게 된다.
결국 드라마는 ‘회복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수렴되고 만다. 자살의 문턱 앞에서 현실로 돌아온 다은, 병희 같은 인물들은 자아 또는 자존감, 꿈을 찾는 여정을 통해 죽음으로부터 구원된다. 하지만 그저 “먹고살기 적당한 직업”이면 된다는 서완의 꿈은 생존할 만한 동기로는 턱없이 부족한 듯하다.
경계 위의 삶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따뜻한 치유 서사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이 드라마는 결국 ‘치유될 수 없는 사람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을 끝내 감당하지 못한다.
서완의 자살과 생존자들의 불안정한 삶은 다만 선 하나의 경계로 나뉘어 있다. 자신의 존재 의미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오늘의 주체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경계인”들이다. 합리화되는 서완의 죽음과 달리 소극적이고 허술하기만 한 다은, 병희의 생존에 대한 설명은 생존자들을 지탱하는 삶의 기반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드러낼 뿐이다.
이 빈약한 ‘삶’에 대한 논리와, 자살에 대한 집착적인 병리화는 분명 불균형하다.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단지 죽음이 병리적인 것이기 때문이라면, 그것은 삶의 당위성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