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지에서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을 때

by 김지구

타지에서 처음 며칠은

나를 설명해야 할 것만 같았다.


어디서 왔는지,

무얼 하는 사람인지,

왜 여기 있는지.


마치 말로 스스로를 증명해야만

이곳에서 존재할 자격이 생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열심이 스르르 풀리는 때가 왔다.


아무도 나의 경력을 묻지 않고,

내가 얼마나 바빴는지 궁금해하지 않고,

여기서의 나는

그저 지금 이 길을 걷는 한 사람이면 충분했다.


그 깨달음이

낯선 도시에서 가장 크게 배운 자유였다.


“잘 살아왔다는 증명”이 필요 없는 자리


일상에서는 늘

뭔가로 나를 보여줘야 했다.


성과, 이름, 하는 일, 속도.


그 모든 것이

나를 설명하는 수단이자 갑옷이었고

때로는 무거운 족쇄였다.


하지만 타지에서는

그 모든 것이 잠시 벗겨진다.


여행32.png


여기서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가로 보인다.


과거가 아닌 현재로,

증명이 아닌 존재로 서는 순간.

이방인은 비로소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


설명 대신 숨을 쉬기


처음엔 말이 없다는 게 불안했지만

점점 말없이도 편안해졌다.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오래 바라보고,

길을 걷다가 멈춰 바람을 듣고,

아무 계획 없이 카페 한 곳에 오래 머문 날.


그날 나는 깨달았다.


설명하지 않기 위해

침묵한 게 아니라,

침묵이 내 자연스러움이라는 걸.


증명을 내려놓는 순간

내 호흡이 제 속도로 돌아왔다.


이름 없는 순간이 만든 온도


어디에서도 특별해야 할 필요가 없는 날.

그런 날은 존재가 가벼워진다.


카페에서 책을 읽는 사람 옆자리를 지나갈 때,

시장 골목에서 언어가 다른 사람과 눈을 맞출 때,

버스 창가에서 흐르는 집들을 바라볼 때.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지만

그게 이상하게도 좋았다.


모양도 역할도 벗은 채

온전히 하루를 살아내는 나로 남아 있었다.


마지막 문장


타지에서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건

세상이 나를 평가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나를 평가하지 않는 시간이다.


그 순간,

나는 세상 속 작은 점이 아니라

세상과 나란히 서 있는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자유는 돌아온 뒤에도

오랫동안 나를 지켜주는 힘이 된다.


떠남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새로운 풍경이 아니라,

가식을 내려놓은 나 자신이라는 걸

그제야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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